시중호는 물 환경 경치 등 모든 것이 살아있는 천혜의 낚시터
해돋이
외교단사업총국휴양소에서 해안까지는 전용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해안가에 쳐진 철책에서 경계 근무 중인 군인들이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소나무 숲을 지나자 통천해수욕장이 펼쳐졌다. 하늘에는 한줄기 구름이 떠 있었고, 바다는 잔잔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동쪽을 바라보며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먼 수평선 끝에서 손톱만 한 붉은 반점이 드러나더니, 곧이어 주황색 태양이 서서히 그리고 불끈 솟아올랐다.
한껏 몸집을 부풀린 동해의 태양은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앞바다의 섬들을 붉게 물들였다.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단순한 볼거리로 그치지 않았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격 그 자체였다.
산줄기 위로 솟아오르는 백두산의 해돋이가 찬란하다면,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는 동해의 해돋이는 장엄했다. 장엄한 태양 아래에서 섬들은 보석처럼 빛났고, 총석정(叢石亭)의 바위들은 더욱 도드라졌다. 동해의 위대한 아침이었다.
- 낚시꾼들이 일출을 뒤로하고 낚시 삼매경에 빠져 있다.
시중호(侍中湖)
아침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흩어지자 진정한 가을이 나타났다. 가을은 금강산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저것이 세월에 깎인 산인가, 아니면 조물주의 작품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남쪽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금강산에서 신비로움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감회는 아닐 것이다.
금강산 자락이 관동 팔십 리에 떨친다고 했던가. 어디서든지 금강산은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눈앞에 드리워졌다. 동해안을 따라 통천과 원산을 잇는 도로 옆에는 철도가 놓여 있었고, 소나무 숲과 물안개 너머로 시중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중호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강원도 통천군 강동리, 산논리, 석도리에 걸쳐 있으며, 북한 천연기념물 제212호, 자연경승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시중호는 시중대(侍中臺)라는 정자에서 유래된 이름이었다. 옛날 강원도 관찰사 한명회가 세조로부터 ‘우의정에 제수받았다는 정자’라고 해서 고을 사람들이 우의정의 고려시대 관직명인 시중(侍中)을 들어 시중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활한 호수의 서쪽과 남쪽에는 평탄한 야산 아래로 농지와 개활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동쪽은 소나무들로 가득한 긴 모래언덕이었다. 불과 삼백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바다까지는 좁은 물길로 연결되어서 바닷물과 민물이 수시로 섞이었다.
언덕에 올라서자 잔잔한 호수와 소나무 숲 너머의 푸른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로 덮인 천도, 난도, 우도, 승도, 송도, 석도 그리고 백도라는 일곱 개의 섬은 바다와 절묘하게 어울렸고, 과연 가슴 속까지 후련해지는 절경을 만들어냈다.
단조롭게 보이던 호숫가 숲 그늘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다. 물가에 설치된 좌대로 건너갔다.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맑은 물이었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엎드려 마시고 싶을 정도였다.
둘레가 삼십 리에 달하고 깊이가 4m가 넘는다는 호수에는 잉어, 붕어, 황어, 숭어, 전어, 초어, 기념어, 버들치, 뱀장어, 뚝지 등 십여 종의 물고기와 새우, 게, 까막조개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뭐라 표현 못할 흥분이 일어났고, 묘한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호수의 맑은 물을 향해 낚싯대를 던졌다. 일렁이는 물결 아래에서 물고기들이 숨 쉬는 것조차 느껴지는 듯했다. 세상이 부러울 것이 없다는 기분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햇살이 부딪치는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은 이미 신선이었고, 그런 착각 속에서 나는 시간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과연 시중호는 물과 환경과 경치 등, 모든 것이 살아있는 천혜의 낚시터였다.
- 북한 아이들이 바다에서 낚시를 하거나 고기를 잡는 모습.
감탕
감탕은 시중호의 빠뜨릴 수 없는 자랑거리였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호수의 바닥에는 4~5m가 되는 진흙층이 깔려 있었다. 광물질 성분들이 듬뿍 섞여 있는 검은 진흙을 몸에 바르는 시중호 감탕은 예로부터 건강에 좋기로 유명했다.
또한 호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샘물 덕분에 겨울에도 잘 얼지 않아서 고니와 물오리 같은 철새들이 많이 날아든다고 했다. 한나절을 신선으로 살았던 나는 현실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시중호 호텔에 들렀다. 현대식 시설로 꾸며진 호텔은 깨끗하고 조촐했다. 이층 건물 주변에는 휴식공간이 배치되어 있었고, 꽃밭은 색색의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당에서 평양이나 원산에서 낚시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사람들은 여유로웠고, 친절했다.
“다양한 물고기들이, 그것도 큰 놈들도 많이 잡힙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도 시중호를 자랑하기에 바쁜 그들은 역시 낚시애호가들이었다. 지나온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나는 시중호 주변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세상 어디에 이만한 낚시터가 또 있을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다음 예정지인 원산을 향해서 출발했다.
- 한 평양 어부가 월척이라도 잡았는지 힘차게 낚싯대를 들어 올리고 있다.
- “조개구이 드시고 가시라우.”
원산(元山)
동명호텔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원산 바닷가와 항만이 내려다보였다. 백사장 왼쪽으로 멀리 갈마지구의 현대식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수 그늘에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낚시용품점에 들렀다. 깨끗한 진열장 안에는 여러 낚시도구가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닐이나 카본낚시대, 찌 등 기본적인 도구 외에도 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도구들도 눈에 띄었다. 물량이 많지는 않았지만, 빠뜨린 것은 없어 보였다.
커다란 배들이 닻을 내린 항구의 저편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철이 지나서 놀러 나온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근처에 사는 듯한 아이들이 바닷가를 뛰어다녔다. 작살을 들고 바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큰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작은 아이들은 저희끼리 모여서 바위틈에서 작은 게를 잡기도 했다.
내내 일정을 함께 했던 조선낚시질협회 위원이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평양어부(平壤漁夫)라고 썼다. 작은 글씨가 성에 차지 않는지 더 커다랗게 썼다. 일부러 모래에 그런 글씨를 쓴 것으로 보아, 낚시를 다룬 남한의 인기프로그램인 ‘도시어부’(都市漁夫)를 의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어부와 평양어부가 함께 하면 어떨까.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정(情)이 아닐까.
장덕섬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에는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었고, 산책을 나오거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버지와 아들인 듯한 두 남자가 나란히 서서 낚싯줄을 던지는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했다. 낚시꾼들 중에는 꽤 비싸 보이는 낚싯대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다리 난간에 붙어서서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다가 그물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이틀 해 본 솜씨들이 아니었다.
푸르른 하늘 아래, 맑은 바닷물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바위에 기대어 앉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방파제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파제 한쪽에 알록달록한 천막이 쳐져 있었다. 혹시나 하면서 천막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그곳은 내가 기대했던 장소였다. 이미 몇몇 낚시꾼들이 자기들이 직접 잡은 물고기들과 조개를 구워 먹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눈에 달라 보이는 나를 스스럼없이 불렀고, 나는 그들 틈에 끼어 앉았다. 그리고 도토리 소주를 주고받았다. 숯불 위에는 팔뚝만한 물고기와 주먹만한 조개들이 익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정말 먹음직스러웠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 더욱이 소주를 곁들여 마신다는 것은 이미 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온 나였다. 옹색한 나무 의자에 올라앉아 낯선 사람에게 소주를 권하는 그들은 소박한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지 않았고,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다. 다만 낯선 사람이라는 것이 소주를 나누어 마시는 이유의 전부였다. 특유의 붙임성이 더욱 친근하게 만들었다. 그들 앞에서 나는 이방인이 아니고 싶었다. 여행 중이라는 긴장감은 어느새 풀려버려서 오랜 세월 동안 서먹하게 지냈다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노을로 물든 방파제를 보자 기분이 무조건 좋았다. 바람마저 기분 좋게 불었다.
- 명사십리, 맑은 모래가 십 리에 걸쳐 있다.
지나온 절경(絶景)들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나는 평양에서부터 동행해 온 자연보호연맹, 조선낚시질협회, 진달래 아동기금의 관계자들에게 내가 그려왔던 계획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지난 며칠 동안 아름답고 신비로운 삼일포와 해금강, 맑고 푸른 시중호, 그리고 멀리서 바라본 가을빛으로 물든 금강산에 대한 나의 감회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천하의 절경들을 보며 지나온 며칠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으며, 한 걸음 한 걸음이 감동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더불어 곳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 특히 조개와 물고기를 안주로 소주를 나누어 마신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뜨거운 동포애도 놓칠 수 없었다. 애당초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으면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절경에 대한 배반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어떤 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를 깨우쳐 주고 싶었다. 관계자들은 내 계획에 개인적으로 동의하면서 또한 현실적인 성과가 가능한 사업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큰 아쉬움을 안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백두산,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함께 북한 오대 명산 중의 하나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금강산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한다는 칠보산(七寶山)을 일정 때문에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바다에 잇닿아 있는 해칠보(海七寶)에는 해금강에서 보지 못한 더 기이한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며, 온천과 바다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곳을 관광과 휴양 그리고 낚시를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동해안 관광의 마침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탐방기를 다 끝낼 즈음, 좋은 소식이 날아왔다. 내가 제안했던 국제낚시대회의 개최가 결정되었다는 공문이었다. 전 세계의 낚시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시중호에서 칠보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절경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행사이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동해안이 낚시와 휴양을 포함한 관광의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간절하게 가져본다.<끝>
안영백(에이블여행사대표)
TEL 027 48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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