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정권에서는 공무원들의 힘이 세진다. 법은 있으나 마나 하고, 권력을 쥔 자의 말과 뜻이 법이다. 그렇게 하는 것을 합법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법의 규제사항을 광범위하고 엄격하게 만들어서 아무도 그 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도록 하고, 범법자들 중에서 누구를 처벌하고 처벌하지 않을 것인가를 담당 공무원이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무원의 재량권’이라는 이름으로.
공자의 덕치를 최고의 통치방법이라고 배운 우리나라 사람들은 ‘법치’ 즉,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것보다 ‘덕치’ 즉 사람의 재량권을 발휘할 여지가 많은 제도가 더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는 그렇게 재량권을 갖게 된 사람들이 모두 ‘덕’을 갖추고 있는 게 아니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편견이나 편리, 심지어는 이익에 따라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나라가 후진국이다. 선진국일수록 법을 비롯한 크고 작은 규정이 합리적이고 촘촘하게 작성되어 있어서 다툼이나 재량권이 적다.
뉴질랜드 법률 중에서 이민법이 가장 후진적인 법률이다. 이민법과 실무지침은 애매해서 이민관에게 ‘폭넓고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와 ‘주관적 판단’을 할 자격을 제공한다. 이민관의 주관적 판단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이민관이 비자를 거부하면 이미 불법체류자가 되어 있거나, 그 다음 다음 날로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고, 추방명령을 받을 수 있다. 일단 추방명령을 받으면 뉴질랜드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 입국하려고 할 때에도 곤란을 겪을 수 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방명령을 받기 전에 이 나라를 떠난다.
비자가 기각된 사람을 자진 출국하도록 만드는 채찍이 ‘추방명령’과 ‘추방 명령 수령자의 재입국 금지’라면, 당근은 ‘추방명령을 받기 전에 자진 출국을 하는 사람은 외국에서 다시 비자신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비자신청을 할 때 신청서 문항에 ‘강제출국조치를 당한 적이 있는가?’와 ‘비자가 기각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있다. ‘비자가 만료된 후 2일 이내에 출국했는가?’라는 질문은 없다. 앞서 포스팅에 썼 듯이 ‘비자가 만료된 날 또는 그 다음 날’이 아니라 ‘비자가 만료된 날에서 이틀 째 되는 날’에 불법체류자가 된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비자가 만료된 다음 날 출국하는 사람은 불법체류를 한 적이 없고, 이틀이 지난 뒤에 출국한 사람은 불법체류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뉴질랜드 이민성에서는 비자를 심사할 때 그 두 종류의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비자신청서에 있는 질문은 ‘비자를 기각당한 적이 있는가?’와 ‘강제출국 조치를 당한 적이 있는가?’ 두 종류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자신청을 기각당한 사람이 나중에 비자 신청을 할 때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면서 뉴질랜드에 불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될까? 거기에 답변을 해주는 법률이나 시행지침은 없다. 법률이나 시행지침을 보면 서슬이 시퍼렇다. 불법체류자가 된 바로 다음 날에 당장 강제출국 명령을 받고 체포되어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다가 출국 비행기를 타게 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신속한 강제출국 조치는, 그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다 체포되거나 한 경우가 아니라면, 취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드는 자료들이 있다.
첫째는 이민 및 보호재판소 (Immigration and Protection Tribunal)에 항소할 수 있는 기간이다.
영주권 비자 신청자가 ‘이민 및 보호재판소’(이하 “재판소”)에 항소하는 경우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다. 여기서는 단기비자(Temporary Visas)에 해당되는 방문비자, 학생비자, 취업비자 신청을 뉴질랜드 이민성이 기각했을 때 재판소에 항소하는 경우만 설명한다.
단기 비자를 신청했다가, 기각한다는 편지를 받아 본 분들은 보셨겠지만, 거기에는 그 판정에 대해서 재판소에 항소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안내문에 따르면 단기비자를 신청했다가 기각당한 사람이 재판소에 항소를 제기하는 데는 시간 제한이 있다. 갖고 있는 비자가 만료된 날로부터 42일째 되는 날, 또는 그 편지 (비자 신청을 기각한다는 통고를 담은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42일째 되는 날 중 나중에 해당되는 날이 재판소에 항소를 접수하는 마감날이다. 그 날짜보다 하루라도 늦으면 재판소에서 접수를 받아주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민성 홈 페이지에 있는 이민법 제61조에 의한 장관 재심 청구에 대한 안내문이다. 이민법 제61조에 의한 장관재심 청구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강제출국 명령을 받지 않았을 것’을 제시하고 있는 한편으로 불법체류 시에 겪을 수 있는 불이익들 중의 하나로 “may not be able to come back to New Zealand again if you are here without a visa for 42 days or longer” 즉, “42일 이상 불법체류자로 뉴질랜드에 머물면 나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비자가 만료되거나 비자신청이 기각된 날에서부터 42일까지는 재판소에 항소가 가능하고, 이민성 홈페이지에서 ‘42일 이상 머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쓴 것을 바탕으로 ‘아하, 그럼 불법체류자로 41일까지는 머물러도 (비자신청이 기각된) 바로 다음 날에 떠나는 것보다 더한 불이익이 없겠구나’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추측이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장해주는 법률은 없다. 이민성 홈페이지의 안내문은 안내문일 뿐이고, 42일 안에는 강제출국을 명령할 수 없다는 법률 조항을 나는 알지 못한다. 만약 위험을 안고도 41일이라는 기간 동안 뉴질랜드에 더 머물기로 결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본인의 판단과 책임이다.
한편으로, 비자가 만료된 뒤에 41일 이상 뉴질랜드에 머물면서도 강제추방이나 재입국 금지 등의 불이익을 받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재판소, 즉 Immigration and Protection Tribunal에 항소하는 것이다.
(다음 포스팅에 계속합니다.)
(c) 권태욱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