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초기에 뉴질랜드 남 섬의 북쪽 끝에 위치한 넬슨을 방문한 적이 있다. 넬슨 칼리지에서 국제적인 모임이 있었는데 그 칼리지를 가는 길에 러더퍼드(Rutherford)라는 도로 이름이 나왔다. 또한 넬슨칼리지에는 러더퍼드 동상이 있다. 러더퍼드가 넬슨 칼리지 출신이라는데 대해 이 학교 출신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다른 키위가 설명해주었다. 러더퍼드가 어떤 인물이기에……
스웨덴의 화학자 겸 발명가였던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의 유언에 따라 1896년에 노벨재단이 설립되었고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을 기해 매년 노벨상을 시상하고 있다. 노벨상은 수상자는 물론 수상자의 국가에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고 있다. 세계평화,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경제학의 6가지 분야에서 세계인류에 이바지한 인물을 매년 선정하여 시상한다. 한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일본은 화학, 물리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부문에서 18명의 수상자를 배출했지만 한국은 2000년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수상한 노벨평화상이 유일하다.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박사는 뉴질랜드 넬슨에서 출생하고 캔터베리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배웠다. 1894년 그의 졸업논문에서 발표한 ‘고주파 전류에 의한 철의 자화(磁化)’는 마르코니에 앞선 전파의 검파방식을 보인 주목할 만한 연구였다. 영국 케임브리지에 유학하고 계속 연구를 거듭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우라늄 방사선 연구에서 알파선과 베타선을 발견했다. 이러한 공로로 190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으니 그 후 100년 이상이 지나도록 한국은 아직까지 학술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한 현실과 비교된다. 뉴질랜드 화폐 중 최 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그의 초상화가 들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리라. 뉴질랜드는 러더퍼드 박사 이후로도 여러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여 왔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이는 1908년 3월 8일 미국에서 섬유노동자들이 정치적 평등권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날을 기념하여 정한 날이다. 19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의 선거권 쟁취 투쟁이 있었으나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 선거권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는 뉴질랜드로 1893년의 일이다.
세계 최초, 최고인 업적을 이루는 것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가치를 창출해내는 것이 된다. 뉴질랜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일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영국이 1918년에, 미국이 1920년에야 여성 투표권이 실시되었음을 볼 때 뉴질랜드가 얼마나 선진 국가였나를 짐작할 수 있다.
뉴질랜드 10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 1848-1934)는 19세기 말에 뉴질랜드 전국 부인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888년부터 여성의 투표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여성들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인 일들이 한 번에 쉽게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서명자의 수를 계속 늘려가면서 세 번에 걸쳐 의회의 문을 두드렸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3만 2천 명의 서명을 받아 다시 제출한 결과 1893년 9월에 의회에서 가까스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다. 3만 2천명의 서명은 당시 여성 인구 중 성인을 기준으로 할 때 절대적인 비율에 해당한다.
뉴질랜드는 와이탕이(Waitangi) 조약이 체결된 이래 174년 동안 선주민(先住民)이었던 마오리 족과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다른 신대륙의 경우와는 다른 융합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이 원주민이었던 아메리칸 인디언, 호주가 애보리진들을 배타적으로 따돌리고 나라를 건설했던 경우와 비교된다.
뉴질랜드의 50달러 지폐에 마오리 지도자였던 아피리나 느가타(Sir. Apirina Turupa Ngata)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는 마오리 족 중 처음으로 정규 대학을 졸업하였고 1905년에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장관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사와 저술활동을 통하여 마오리 족의 정착과 권익신장 등을 위한 업적을 쌓아 나갔다.
지폐에 여성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한국에서는 최근에야 5만 원 권을 발행하면서 신사임당의 인물 사진이 등장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뉴질랜드에서는 영국 여왕은 차치하더라도 일찍부터 케이트 셰퍼드가 지폐의 인물로 채택되었다. 뉴질랜드다운 일면을 보는 것 같다.
한 일 수 (경영학박사, 전 뉴질랜드한인사 편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