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지로 이사 와서 살기 전에 교외 농장주택에서 9년 동안 살아본 경험이 있다. 전 주인으로부터 키우던 가축들을 전부 인수받았는데 양, 염소, 고양이, 타조, 거위, 칠면조, 오리, 닭 등 머리수로 140이 넘는 대가족의 수장으로 변신한 것이다. 가족과 140여 동물들은 우리 집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동물들도 가족 공동체의 구성원은 알아보고 처신한다. 예를 들어 자기 집의 개가 옆집 고양이는 물어뜯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의 고양이 새끼라도 건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먹이를 구하러 돌아다니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할 때, 같은 종끼리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닭은 닭끼리, 오리는 오리끼리, 양은 양끼리……. 닭들이 싸울 때는 그야말로 사생결단하고 피터지게 싸우는데, 어느새 서로 화해가 되었는지 다시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볼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살 수는 없고 여럿이 모여 공동체를 형성하여 협력하면서 모듬살이를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다.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족과 친척이나 광역 단위인 태어난 나라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모듬살이 이고 다니는 직장이나 참가 단체, 살아가는 마을 등은 후천적으로 선택해서 참여하는 모듬살이 단위이다.
뉴질랜드 한인들은 선천적인 공동체, 즉 가족과 친지, 태어나 성장한 나라를 뒤로 하고 새로운 모듬살이 구조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처지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천차만별이고 정치 체제나 사회, 문화, 규범, 제도 등이 판이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은 정반대이기도 한 뉴질랜드라는 공동체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여 민족이 대부분 후천적인 선택에 의해 모여 살고 있으므로 다양한 문화, 인종적 특성, 생활 규범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살기 좋은 뉴질랜드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뉴질랜드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지 않고 화합을 이루어 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선천적 구조나 성장 배경이 판이한 사람들이 모여 화학적으로 같은 색깔을 창조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다양성은 서로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되 차별은 두지 않는 다는 입장이다. 배경이 유사한 구성원끼리 모여 친교를 나누고 모듬살이를 형성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신이다. 그래서 각 출신 민족끼리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러한 공동체가 모여 뉴질랜드라는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모듬살이는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한다. 한인들이 한인들을 경계하고 한인 사회에서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될 때 어느 공동체에 편입되어 살아 갈 것인가? 각 소수 민족 그룹들은 각각 그들의 공동체가 있다. 벼가 호밀 밭에서 같이 서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뉴질랜드 한인들은 각 지역별로 한인회를 구성하여 한인들의 모듬살이를 주도해 나가고 있다. 어떤 이는 한인 사회를 부정하고 스스로 울타리 안에 갇혀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한인회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니까 아예 외면하고 지내겠다는 사고이다. 살아가는 방식이야 각자 나름의 길이 있겠지만 잘 살아 보겠다고 멀리 떠나온 이곳 뉴질랜드에서 정을 붙이지 못하고 외톨이가 된다면 어디 가서 뭘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어느 모듬살이 이든 문제가 전혀 없이 웃음소리만 들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문제가 없이 조용한 곳은 공동묘지일 뿐이다. 어려울 때나 즐거울 때나 참여하여 기쁨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모듬살이의 일원이 되어 긍정적으로 살아 갈 일이다.
지난 15일 오클랜드 한인의 날 행사 때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인들이 모여 뜻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또한 현직 총리, 장관, 국회의원, 저명인사, 일반 키위들도 같이 한류문화를 접해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한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어느 구석에 처박혀 살고 있다면 어느 누구가 찾아와 줄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한인들은 오랜 갈등 속에 시달리다가도 어느 순간 그것을 치유하고 재충전해서 다시 활기찬 출발을 하는 특성이 있다. 한인의 날을 마치고 다시 심기일전해서 약진하는 한인사회를 기대해본다.
한 일 수 (경영학박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