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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5/2012. 11:42 KoreaPost (202.♡.85.222)
한인뉴스
감독이 경기승패 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야구전문가들이 분석을 해보았다. 그 결과 한 시즌에 전 경기의 5%에서 10%정도 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100경기를 하면 10경기에도 못 미친다는 분석이 나왔다. 어떤 감독들은 많은 작전과 경기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무리한 작전과 팀 운영으로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얻으려 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경기 운영을 선수들에게 맡겨서 선수들의 역량으로 승리를 취하는 감독이 있다. 두 가지 유형의 감독이 있다면 어떤 쪽이 바람직할까?
이러한 감독의 취향을 구단이 선택 계약을 맺는다. 구단이 결정을 하면 그 결정에 따라 팀컬러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팀에서 선수로서 코치로서 22년간 함께 한 김응룡 감독의 경우 선수가 마음껏 경기를 치룰 수 있도록 해주는 타잎의 감독이었다. 많은 작전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김응용감독은 그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고, 선수들이 태만한 경기를 하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면 가차없이 혼을 냈고, 경기중에는 승리를 향한 욕망을 내보인 철저한 승부사였다. 한국프로야구에서 최초의 자율야구를 추구한 감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산 한화 감독을 지낸 김인식 감독님도 선수를 믿고 선수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에 덕장 감독으로 명성을 떨쳤다. 감독이 해야 할 최고의 일은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기량을 정확히 파악하여 선수가 가지고 있는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경기 운영을 하여 팀의 승리를 가져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구감독이라는 직업은 화려해 보이지만 매일 승부에 대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고, 홀로 고민을 해야 하는 대단히 외롭고 힘든 직업이다. 한국프로 야구팀의 경우 한 팀에 선수들만 60명에서 65명 의 선수단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 선수들의 기량을 일일이 파악하고 그 중에 우수선수를 선발하여 1군에 25명의 선수를 추려내고, 그 중에 베스트9을 선발하여 경기진행을 해야한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감독이 경기의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다는 분석이 나온 것은 아이러니 한다. 결국 감독이 가져야 할 최고의 능력은 좋은 선수를 발굴하여 키워내고 그들이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는거라 할 수도 있다. ‘경기는 선수가 한다`, ‘승리의 공은 선수에게, 감독은 패배의 책임을 지면 된다’ 라는 야구계의 속설이 있다
초창기의 야구는?
심판이 없었다???
초창기(1800년대) 야구에는 심판이 없었다. 야구는 여유로운 전문직 도시인들끼리 즐기는 ‘여가’고, 규칙 또한 극히 단순해 판정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1845년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현대 야구의 근간이 되는 규칙들을 만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야구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운 종목이 된 것이다. 야구장에 심판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다.
<뉴욕 타임스>의 원로 칼럼니스트 조지벡시(George Vecsey)는 [야구의역사](Baseball)에서 초기 야구 심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이 심판들은 모자와 연미복을 갖추고 3루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심판의 조상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하키 마스크를 쓰고 두꺼운 프로텍트를 덕지덕지 매단 투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당시의 심판은 판정을 내리는 게 아니라 경기를 하는 선수들 간의 ‘토론’을 중재하는 일이 주된 임무였다. 이는 심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umpire)의 어원인 ‘numpire’의 의미를 연상하게 한다. ‘제3자’라는 뜻의 이 프랑스어 단어는 당사자가 아닌 중립적인 위치에서 중재자 노릇을 해야 했던 초기 심판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알렉산더카트라이트(Alexander Joy Cartwright, Jr)는 야구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심판이기도 하다. 그는 1846년 6월 19일 뉴저지에서 열린 니커보커 클럽과 뉴욕의 경기에 심판으로 나섰다. 경기는 뉴욕의 23-1 대승으로 끝났다.
스트라이크가 없었다?? 애초의 '스트라이크'는 타자가 헛스윙한 것만 가리켰고 세 번 헛스윙한 타자는 아웃이었다. 그러나 타자는 때리기 싫은 공은 치지 않으면 그만이었으며 그러나 반드시 스윙 하도록 강요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타자는 투수에게 높은 공, 또는 낮은 공을 던지라고 요구할 수 있었고 투수는 거기에 따라야 했다. 오늘날의 야구규칙에 비춰보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타자는 타석에 뻣뻣이 서서 투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스윙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투수가 아주 좋은 볼을 던질 때까지 스윙하지 않고 마냥 기다릴 수도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하품을 하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냥 뻣뻣이 선 채로 버틸 수도 있었던 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끈기가 매우 강하거나 아웃 되는 것을 겁내는 타자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투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안타를 맞는 게 두려운 투수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타자가 건드리지도 못하도록 연신 나쁜 공만 던지면 그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