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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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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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음악 방에 영화음악 ‘피아노’가 올랐다. 영화의 여러 장면이 떠올라 한나절을 음악에 묻혀 지냈다. 그 영화를 본 것은 1993년, 촬영지가 ‘뉴질랜드’라는 광고를 보고 서둘러 개봉관을 찾았었다. 그 곳으로 이주 신청을 해놓고 떠날 날을 기다리던 때였다. 배경이 된 피하비치(PIHA BEACH)의 아름다움과 바다에 가라앉던 피아노의 강렬한 영상이 눈에 선하다.


이삿짐을 풀고 맨 먼저 찾은 곳이 ‘피하’였다. 바닷새가 군락을 지어 알을 품는 바위언덕이 시골마을처럼 따뜻하던 그 곳은 영화촬영지라는 간판을 내걸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바다였다. 파도 타는 젊은이와 낚시꾼들을 보내고 고요하게 노을을 맞는 저물녘의 바다, 나는 그런 피하가 좋았다. 그러나 눈 닿는 곳마다 그림엽서라는 자연 속에 살면서도 늘 무언가 허전했다. 사람이 그리웠다. 사람 속에서 살고 싶었지만, 사람 속으로 향하는 길은 멀었다. 눈길 한번 주는 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막막할 때면 그 곳으로 갔다. 해거름의 피하에 가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곤 했다. 쉼 없이 뒤척이다가 제풀에 잦아드는 파도처럼.


두 아이가 학교에 익숙해지자 남편은 주류도매 가게를 열었다. 점원과 재고 상품을 함께 인수한 가게는 손님이 많았다. 외로울 겨를이 없었다. 함께 일하게 된 점원은 중년의 백인여자와 원주민 청년이었다. 백인 아줌마 ‘로빈’은 깍듯하면서도 틈만 보이면 주인의 기를 꺾으려 들며 잘난 체했다. 사람 속에 살기를 바랐지만, 사람 때문에 주눅 든 나를 북돋우어 입을 열게 한 이가 마오리 청년 ‘필’이었다. 그는 영화 속의 남자 ‘베인스’ 처럼 문신을 했고 말이 없었다. 벙어리가 된 주인을 위해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얘기하며 묵묵히 일하던 필. 그로 하여 나는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 서툴게나마 말을 시작하고 차츰 낯선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주급을 받는 금요일은 일손이 부족했다. 길게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고객을 위해서는 파트타임 점원을 따로 사야 했다. 그날 누구보다 분주한 사람은 점원들을 위해 바비큐를 준비하는 안주인이었다. 소금 후추 외에 고기양념이 따로 없는 곳에서 간장에 버무려 맛을 낸 양념갈비는 시장기 도는 이들을 자극하는 일품요리였다. 특급요리사라 엄지를 치켜 주는 점원과 손님들의 주말파티를 위해 나는 간장을 말통으로 사다 놓고 갈비를 재워댔고 그렇게 조금씩 이국생활에 젖어들었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식사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점원 구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주말 바비큐의 영향도 없지 않았으리라.


토요일은 행복한 날이었다. 주말학교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토요일마다 문을 여는 한국학교에서는 교민이나 주재원 자녀들에게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그것은 낯선 문화에 부대끼고 풀 죽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일이었다. 내 교직생활에서 가장 기쁘고 보람 있던 시절은 우리말이 어눌한 아이들을 위해 꼼꼼하게 교안을 작성하고 가르치던 그때였을 게다. 자녀들이 공부하는 동안 뜰에서 떡볶이와 잡채를 만들고 호떡을 굽는 부모들도 잔칫날처럼 환한 얼굴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힘을 키워주던 주말학교. 일주일에 단 하루였지만, 타국 속의 모국이 되어 주었던 그 곳에서 우리는 마음껏 행복했다.


새해가 되면 여러 나라 민속놀이가 전파를 탄다 .‘마오리춤’을 방영한다는 예고가 있으면, 나는 서둘러 텔레비전 앞에 앉는다. 우리와 피부색이 같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족. 웃통을 훌렁 벗어젖히고 혀를 쑤욱 내어 빼물고 추는 그들의 춤을 보고 있으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뭔가 도움 주려 애쓰던 필이 보고 싶어진다. 사람 수보다 많다는 순한 양떼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하늘가에 뜨던 무지개도 생각난다. 잊혀진 듯해도 지나간 날들은 무의식의 갈피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스며있는 것 같다. 낯선 세상에 살면서 익힌 낯선 것에 대한 자유로움까지도.


음악을 들으며 다시 ‘피하비치’를 거닌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뉴질랜드를 떠나야 했던 영화 속 여인 ‘에이다’. 그녀처럼 나도 그곳에서 떠나왔다. 영화에 후속편이 있다면, 그녀도 나처럼 지난날을 잊지 못하고 그 시간 속을 서성일까.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는 필름을 명화라고 한다면, 낯선 문화에 부대끼면서 살아낸 내 삶의 한때도 한 편의 명화가 되리라. 그리운 시절이다.


■ 최 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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