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9 개
3,019
16/08/2011. 14:37
NZ코리아포스트 (202.♡.85.222)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옛날 옛적에, 여우가 캥캥 울어대는 골짜기(여우난골)에 사람들(여우난골 族)이 모여 살았습니다.
<얼굴에 별자국(곰보)이 솜솜났지만 재주가 좋아 하루에 베 한 필을 짜는 신리 고모, 과부가 되어 섧게 눈물 짤 때가 많은 큰 골 고모, 그녀의 딸 홍녀 아들 홍동이, 주정을 부리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오리덫)를 잘 놓은 삼촌, 늙은 홀아비 후처가 된 고모 등이 할아버지 할머니 방안에 모였습니다. 인절미, 송구떡, 두부, 도야지 비계를 배부르게 먹고 어른들은 밤이 깊어가도록 웃으며 도란거립니다. 아이들은 매나무 동산에서 쥐잡이, 숨굼막질(숨바꼭질), 가마타고 시집가고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이도 하다가, 어른들을 집적거리며 해찰을 부리기도 하지요.
이렇게 사기 등잔의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새벽닭이 울도록 놀다가 아랫목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듭니다. 아침이 되어 장지문 틈으로‘무이징게국(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이는 국)’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올 때까지--->
1930년대 활동했던 시인 백석(白石)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그곳에 ‘여우난골’이라는 동리가 있었나봅니다. 위 < >안의 글은, 그의 시 ‘여우난골족’을 간략히, 사투리를 해석해서 써보았어요. 시는 ‘무이징게국’ 내음새가 코 속으로 파고들며 시원하고 달큰한 여운을 남기고 끝나는데요, 머릿속에선 또 다른 시가 이어집니다. 여자들이 들이닥쳐 엉덩이를 때리고, 엉기적 일어난 애들은 눈꼽을 쥐어 뜯으며, 왁자지껄 ‘무이징게국’을 즐기겠지요. 눈곱 한 덩이가 국에 빠진들 대수겠습니까? 곰방대 두드리는 소리, 명랑한 웃음이 하늘 높이 음표가 되어 천상의 하모니를 연주하는, 충분히 맛 있는 아침인걸요.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닌, 시의 후일담을 그려보긴 처음입니다. 내가 ‘여우난골족’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뒤 얘기를 알겠어요?
나도 ‘여우난골족’이었다는 기쁨과, 그 족속의 향기로움을 잃어버렸다는 회한이 몰아쳤지요. 백석은 늘 그랬어요. 백석의 사랑담도 내 얘기인 듯 했어요. 집안이 몰락하여 기생으로 팔려간 여인 김영한과 백석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했어요. 백석 집안에선 결혼을 반대했고 강제 결혼을 여러 차례(백석이 도망쳤으므로) 시켰답니다. 백석은 일본 유학 후 북에서, 자야(子夜; 백석이 지어준 김영한의 호 )는 서울에서 살게 되지요. 훗날 ‘자야’는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의 주인이 됩니다. 백석을 가슴에 품은 채 ‘자야’는 1999년 서방정토로 떠납니다. 그보다 2년 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던 ‘대원각’ 터는 자야의 법명(길상화)을 따 ‘길상사’라는 도량으로, 진흙 속 연꽃처럼 피어납니다. ‘자야’의 유골은 ‘길상사’에 뿌려졌어요.
백석의 시는 1980년대 해금되었는데요, 질박한 우리말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일본에서 공부한 지식인의 겉멋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지요. 생소하기 그지없는 평안도 사투리는, 큰 북처럼, 무뚝뚝하지만 진솔하게 가슴을 쳐댑니다. 백석의 시어(詩語)를 싹 틔운 토양은, 투박하지만 비옥한 우리 삶의 원형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의 시어를 몰라도 그의 시가 낯설지 않습니다.
백석이 주로 시를 썼던 시기에서 어언 8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요. 살림살이 좀 나아졌나요? 우리는 점점 가난해지고, 불행해지고 욕심만 많아지고, 악의 씨만 많이 떨구고, 아이들은 덧없는 경쟁과 욕망의 막다른 길로 내몰리고 있지요.
‘여우난골’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 골짜기와 사람들이 그리워요. 어려운 일은 품앗이로, 경사가 생기면 온 동네 사람들이 잔치를 벌였지요. 헐뜯고 시기하고 다투고, 갈등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지요. 남이야 죽든말든 자기 배만 불리겠다고 욕심을 부리고, 자연을 거스르고 망가뜨리는 일도 없었지요. 삶의 원형을 변형시키거나 깨부수지 않고 보름달처럼 둥글게 다독거리면서 사는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속에서 내가 숨쉬고 있었어요! 나는 그때, 나비가 하얀 고치를 찢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았고, 봉숭아를 짓찧어 손톱에 올리고 아주까리 잎으로 동여맨 저려오는 손가락을 밤새워 견디고, 암탉이 울고간 덤불을 뒤져서 달걀을 찾고, 할머니와 마실을 가서 동치미와 찐 고구마를 먹고 달빛을 밟으며 돌아오곤 했지요.
‘여우난골’에서는 여우가 우는 밤에, 잠 없는 노친네들이 일어나 팥을 깔고 방뇨를 해서 마을의 흉사를 막았답니다. 나도 온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편지를 쓰겠어요. 때가 묻고 더러워진 우리네 삶이 순진무구해지고, 타오르는 욕망의 불이 잦아들어 화기애애해지고, 이해타산없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우리가 사는 이곳이 ‘여우난골’이고 우리가 그 ‘족속’임을 잊지 않기를 ------.
ⓒ 뉴질랜드 코리아포스트(http://www.koreapost.co.nz),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