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장례식에 가본 적은 딱 두 번이었다. 하나는 아주 오래 전, 하나는 비교적 최근.
처음으로 갔던 장례식은, 사실 누구의 죽음이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먼 친척 뻘이었던 할머니 같은데, 그 분이 나와 어떤 관계였고 만난 적이 있는지조차도. 그나마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라곤 온통 순백색이었던 장례식장의 벽과 천장이다. 바닥 자체는 평범한 온돌식의 나무 바닥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벽과 천장은 온통 새하앴다. 어느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장례식장이었고, 그래서 추모가 진행되고 있는 그곳을 한 발짝만 나가면 바로 차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소음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1990년대였다. 방음은 아직 썩 좋지 못했다.
그 외에 기억할 수 있는 건 영정 사진이다. 검은 테와 띠가 둘러진 사진, 그 아래 다 타들어가 꽁지만 남은 향 몇 가지, 그리고 그 제단 앞에서 바닥을 손바닥으로 마구 내려치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던 나이든 아줌마들 몇 명. 아이고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우는데 그분들이 그 할머니의 며느리들인지 딸인지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저, 그들의 슬픔에 이해나 공감은 하지 못했다는 것. 죽음이 뭔지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실감은 전혀 느끼지 못한 내게 그 상황은 답답하고 싫어하는 검정색 볼레로 원피스를 입고 얌전히 있어야 했던 때로 남았을 뿐이었다. 웃어도 안 될 것 같은 숙연한 분위기, 졸리고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어 엄마를 졸랐지만 오늘밤까진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엄마의 대답에 실망해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것까지.
그 후로도 죽음이 명확히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는 잘 깨닫지 못했다. 이해하게 된 것은 두 번째 장례식을 통해서였다. 이번에는 그저 먼 친족이 아닌 가까운 가족이었고, 워낙 갑작스러웠기에 모두에게 충격을 준 죽음이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더 볼 사람이라고 당연히 믿었기에 더더욱.
떠난 사람의 흔적만 보아도, 사진만 보아도 눈물이 쏟아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그때 깨달았다.
나 자신의 상실감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도리어 그 자리를 미칠 듯한 동정심이 차지해 심장을 먹먹하게 했다.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장례식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고, 나 또한 급파를 듣고 달려왔기에 검은 옷이라곤 코트 한 벌밖에 없어 그것만 위에 대충 걸치고 문상객들을 접대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어른들은 모두 붉어진 눈과 지친 얼굴을 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간헐적으로 통곡을 터뜨리며 떠난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울부짖었다. 웃고 있는 영정 사진 아래엔 향의 잿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곁엔 채 바치지도 못한 흰 국화들이 벌써부터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의 부인 (편의상 숙모라고 부르겠다) 이 사망 신고와 필요한 서류를 급하게 떼러 갈 때 함께 가겠다고 자청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달이 희고 밝았지만 채 보름달이 차지 못해 약간 이지러진 달이었다. 그 달빛은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파르스름한 기운은 전혀 없이 순수하게 맑고 환하던 달빛, 조명 하나 없이도 앞으로 걸어가는 돌길을 훤히 밝혀주던 달빛. 벌써 시들어버린 흰 국화, 검은 상복들과 양복, 더 이상 울 기운도 없어 지쳐버린 채 자리만 지키던 아이들.
그 날의 달빛 때문에 나는 돌아가신 분께 바치는 시를 지었다. 하이쿠다.
<그리운 이여,
그대 없어도 저 달
아직 빛나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