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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생각보다 빨리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정원에 소담하게 올라온 머위들이 살며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정 봄이 온 것일까? 파미에서 20여년을 봄을 맞이했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봄이 온 걸 눈치 채게 되는 걸 보면 내가 참 둔한 사람인 것 같다.
외출을 잘 안하고 집에 있기를 좋아해서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튼 봄은 이렇게 나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봄을 알린 머위를 그냥 바라만 볼 수는 없었다. 봄의 향기를 맛보아야하지 않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머위 줄기들을 잘라서 끓는 물에 데쳤다. 봄날에 처음 올라온 머위들은 살짝만 데쳐도 아기 살갗처럼 보드랍다.
손바닥 만 한 머위 잎 위에 현미밥을 얹어 놓고 쌈장을 곁들여서 싸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오늘 나는 작년에 나에게 머위를 분양해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머위 소식도 전할 겸 얼마 전에 담근 갓김치도 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다행히 그 친구는 집에 있었고 조금 후에 병원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오면서 우리 집에 잠깐 들러서 갓김치를 가져가면 좋을 듯 했다. 갓김치의 위력은 대단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도 갓김치를 가지러 우리 집에 왔다.
귀한 머위장아찌를 손에 들고 온 그녀. 그렇게 빈손으로 오라고 했건만, 그녀의 성격으로는 빈손이 힘든 것 같다. 난 그녀에게 빈손으로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건만.
어쨌건 자신보다 큰 골프 우산을 쓰고 온 그녀는 점심으로 남편과 함께 갓김치를 먹으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맛있었다는 전갈이 왔고, 앞으로 갓김치를 담가서 먹어야겠다고 했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갓김치를 좋아한다. 그런데 한국 갓이 아닌 중국 갓으로 김치를 담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단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어느 날 중국 갓으로 김치를 한 번 해보니, 제법 맛이 좋아서 그때부터 갓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갓은 배추와 달리 사시사철 수확할 수 있는 채소라서 배추가 나지 않는 계절에도 김치를 담가 먹을 수가 있어서 좋다. 소금에 살짝 절여서 양념을 하면 되기에 포기김치보다 덜 번거로워서 좋다.
이번에 내가 갓김치를 참 많이 담갔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갓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레빈의 한 농장에서 재배를 한 것인데, 너무 크게 자라서 상품성이 없는 갓이라면서 잔뜩 주었다고 한다.
배추가 나오지 않을 때 갓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었던 나에겐 횡재가 따로 없었다. 배추 다섯 포기로 김치를 담가도 몸살을 앓았던 나였지만, 갓김치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 배추 다섯 포기보다 많은 양의 갓을 무조건 집으로 가지고 왔다.
얼마나 튼실하게 잘 자랐는지, 배추 두 배의 길이에 한 장의 줄기 폭이 7cm 정도 되었고 푸른 잎 또한 배추 저리 가라할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큰 갓으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피클을 담아 먹는다고 한다.
줄기가 두툼하고 배추보다 뻣뻣해 보이지만 아삭하고 물이 많아서 김치를 담그면 맛있을 거 같았다. 한껏 욕심을 내서 갓을 가져오긴 했는데, 요즘 내 몸 상태가 워낙 비실이 수준이라. 그래도 물질적인 욕심 앞에서 없는 힘도 내기 마련인가 보다.
갓김치를 한다고 잔뜩 벌려 놓고 있는데, 큰애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 왔다. 힘든 일은 자신이 다 할 테니, 옆에서 조언만 해달라고 했다. 감기에 걸려 있는 아이에게 맡기기가 미안했지만, 함께 김치를 담그기로 했다.
김치는 성공적으로 잘 만들어졌으며, 그 김치는 갓을 준 지인의 입도 즐겁게 해주었다. 갓을 준 사람은 말레이시아인이다.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하며 요리하기도 좋아하고 한국음식을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뚝배기를 즐겨 사용하며, 김치 또한 좋아한다.
자신이 준 갓으로 만든 김치를 먹어보더니, 갓김치 맛에 반해버렸다고 한다.
오죽 맛있었으면 갓을 더 주겠다는 말을 했을까? 그 소식을 전하는 지인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언니, 갓김치를 더 담글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우리 집에 일꾼들 많아서 괜찮다고. 결국 그 갓이 우리 집으로 도착했고, 이번 갓김치 담그는 일은 사위 몫이 되어 버렸다. 학교에 다녀와서 저녁 먹고 나서 시작한 김치 만드는 작업은 12시가 넘어서야 완성이 되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던지....... 둘이 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김치가 되었다. 이렇게 만든 김치들이 냉장고에 가득 진열이 되어 있다.
딤채 같은 김치냉장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다. 김치 냉장고가 따로 없는 것이 더 좋다. 맛있게 맛이 들었을 때, 지인들과 나눠 먹는 즐거움을 맛봐야 한다.
안 그래도 요즘 나누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고 있는데,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지는 수레를 탄 것이 틀림없는데. 수레바퀴가 신나게 굴러가도록 놔둬야 한다.
사실, 내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 양란 두 줄기, 심장에 좋다고 보내 온 용과, 멜론, 레몬, 그레이푸룻, 미역국 한 냄비, 스시, 매운 고춧가루, 구운 김 100장짜리 한 팩, 블루베리 머핀., 머위장아찌.......등 이번 한 주에 받은 선물만 해도 차고도 넘친다.
내가 받으려고 주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받으려고 주는 게 아니다.
그저 주고 싶은 마음으로 서로 주기만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매일 끔찍한 기사가 인터넷을 장식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래도 우리는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살 수 있음에.
사랑이 있음에.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