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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댕이치고 멀리로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것이 헌 신짝이다. 헌 신짝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간의 애증이 있다 해도 어쩌겠는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9남매가 자란 우리 집엔 새것이란 없었다. 셋째 아들인 나는 형들의 것을 물려받아 모든 게 다 누더기 같은 것이었다. 한 여름을 소먹이고 풀 베고 지내면 찬바람 들 때 추석이 온다. 그때 긴팔 셔츠 하나 새 옷을 얻어 입는다. 당연히 헌 옷을 물려 입는 것인 줄 알고 자랐다. 헌책에 헌 책 보따리.... 책가방이라고는 딴 세상 이야기였다. 언제 양복을 입어 보기나 할까 싶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베신’이라는 운동화 보다는 고무신을 더 많이 신었다.
직장을 은퇴하면서 그 많은 책을 다 버렸다. 누군가 필요하면 가져가시라 했더니 어떤 이가 트럭을 몰고 와 쓸어 담았다. 그전에 나는 꼭 필요한 몇 권만 챙겨왔다, 내가 힘들여 썼거나 번역한 책, 형광펜 칠과 메모가 가득 들어 있는 강의 교재 등이다. 논문도 다 버렸다. 검색하면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그 논문들은 유치찬란한 수준의 것 아니겠는가. 버릴 물건 중에서 가져올 물건을 고르지 못해서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챙기고는 다 치우라고 부탁했더니 그게 미련 남기지 않는 방법임을 알겠다.
간편하게 살자고 마음먹었다. 집에 오래도록 쓰지 않는 물건들을 치웠다. 꼭 필요한 것들 중심으로 살자고 널찍한 책상을 구했다. 6인용 앤틱 식탁을 구해서 유리판을 깔고 모니터를 2개 놓았다. 동시에 두어 가지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필요한 방송이나 동영상을 보면서 워드작업이나 계산 작업을 하였다. 컴퓨터와 프린터는 상 밑에 두었다. 그런데도 너른 책상이 금세 좁아지기 시작했다. 보던 책, 연습장이며 잡지며 스크랩 기사며, 문방구 까지 이러저러한 것들이 쌓여 자판을 놓고 마우스를 움직이는 공간마저 줄어들기 시작했다. 차 한 잔을 놓고 먹기에도 좁아 불편했고 밥을 먹으려니 식탁이 아니라 책상이고 책상이 아니라 곧 작업대가 된 것이다. 정리가 필요했다. 정리란 버리는 것이다. 이면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거기에 글을 적고는 워드로 입력했으면 버려야 하는데 그걸 또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두었던 것이다. 왜 못 버리느냐고? 손으로 적은 연습장에 땀이 배어서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정말로 단출하게 살아볼 생각이었다. 유목민들이 집을 분해해서 옮겨 금세 짓고 살듯이, 당장 입을 옷과 쓰던 컴퓨터와 몇 가지 물건을 승용차에 싣고 떠났다. 허물 벗듯이 벗고 나온 것이다. 쓰던 가전제품은 아는 사람들에게 가져가되 있던 자리 청소를 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안 가져가는 것이 내가 잘 활용하던 그 단단하고 우아한 6인용 앤틱 식탁이었다. ‘당근 마켓’(중고품 거래 앱)에 반값으로 올려도 입질이 없다. 식탁이 없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거의 1/3 가격으로 내려 팔았다. 이런 이유로 내가 당근 마켓의 제품을 골라 찾고 있다. 누군가가 나처럼 어쩔 수 없이 좋은 물건을 거저 파는 경우가 있겠구나 하게 된 것이다.
이사를 와서 당근 마켓을 훑어보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검색하고 살펴본다. 고르고 골라 흰색 피아노 하나를 샀다. 흰 색의 벽과 침구에 맞춘 것이다. 거의 새 것인데 1/3 가격으로 샀으니 내 앤틱 식탁을 보상받은 기분이다. 중고품 시장에는 아예 새 것을 팔기도 한다. 그건 행운이지 않은가? 가끔은 이리 저리 당근 마켓을 훑어본다. 안 살 물건도 욕심이 난다. 이거 사 두었다가 누구에게 선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는 사람은 이사를 가면서 필요 없게 되었거나 무언가 열심히 쓸 작정으로 사 놓고는 안 쓰게 되어 되판다. 자라거나 몸이 불어 못 입는 것도 있다. 그 사정을 다 어찌 설명하겠는가? 필요한 것이고 쓸 만한 것이 아주 저렴한 가격이라면 따봉아닌가?
평생 헌 옷과 쓰던 물건만 물려 입고 쓰다가 한 번이라도 번듯한 새 옷, 새 차, 새 집에 살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새 것이라도 한 번 입고 쓰면 중고 아닌가? 헌 옷이라도 몸에 맞고 깨끗하게 빨고 깔끔하게 고쳐 입으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하나 더 있다. 옷걸이를 좋게 하려고 노력하기는 한다. 입으면 날씬하지는 못해도 청년의, 아니 노년의, 아니다. 장년의 멋스러움이 배어나도록 관리하기는 한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배불리 먹지 않는 절식(節食)이 만사다. 누구는 인사가 만사라 하더니만.....
■ 조기조(曺基祚 Kijo Cho)
- 경남대학교 30여년 교수직, 현 명예교수
- Korean Times of Utah에서 오래도록 번역, 칼럼 기고
- 최근‘스마트폰 100배 활용하기’출간 (공저)
- 현 한국도박문제관리센터 비상근 이사장으로 봉사
- kjcho@u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