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흐르는지 머물렀는지
알 수 없는 섬진강
사람들 걸음 따라
흔들렸던 구례 오일장
정신을 바짝 깨우는
장엄한 화엄사
붓끝에서 피어나는
전심전력의 아름다움
걸어도 걸어도, 걷고 있어도 걷고 싶다. 걷다가 내가 흐릿하게 사라져버리는 환영. 타클라마칸의 유목민처럼 영혼의 애타는 갈증을 따라가면 열망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까. 구례구역에서 강변을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휘휘 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곧게 늘이면 얼마나 길까. 물이 질리면 마음을 들어 산을 올려다보았다. 저 첩첩산중 지리산을 평평하게 펼치면 얼마나 넓을까.
그러다 지치면 아무 데나 앉아 눈을 감고 망상했다. 빛은 사랑의 압축일까. 너에게 닿고 싶고 너를 향한 사랑이 빛으로 화해서 10조9만5천48자의 꽃이 되었을까. 그 한 송이 한 송이가 각자에게 피어나 스스로 붓다가 되어 깨어나라 하심일까. 그 우주적 사랑의 큰 그림이 화엄의 세계일까.
가장 먼 길
그러나 붓 끝을 글자 첫 획에 갖다 대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넘어져도 넘어져도 또 일어나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한 획 한획 나아가야 한다고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무엇이 내 몸을 떨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 없이 나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웃자란 걸까. 일필휘지는 아닐지라도 사경할 글자를 따라 붓을 조금씩 움직이는 것조차 아예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화엄사에서 매주 목요일 펼쳐지는 사경원 강의 시간. 이것이 직면한 현실이었다. 지금 나에게는 머리에서 붓을 쥔 손가락 끝까지가 가장 먼 길이다. 너무 멀어서 갈 수 없는 슬픈 길.
사경은 불교문화가 활짝 꽃피웠던 고려시대에 최고의 불사이자 예술이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고 강력하게 전파하는 최상위의 방법이 바로 사경이었던 것. 국가무형문화재 최초의 사경장으로 지정된 김경호 원장은 고려 말 이후 700여 년 동안 맥이 끊어진 사경을 40년 넘게 사력을 다해 작업하여서, 고밀도의 예술이자 심오한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바로 그이가 지금 눈앞에서 사경 강의를 하고 있다.
선생의 부드럽고 유려한 음성은 고운 붓처럼 마음을 토닥토닥 다독여주는 느낌이었다.
느린 걸음, 느린 욕망
사경 수업 날보다 하루 먼저 구례에 도착해서 섬진강변을 걷다가 강과 이별하고 읍내로 들어섰다. 유서 깊은 구례 5일장이 있는 날. 장은 지리산을 꼭 닮았다. 피아골, 뱀사골, 달궁, 정령치 같은 골목골목에는 산과 들과 하늘과 바다와 강이 키운 온갖 것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 여기 있어요! 장을 찾은 사람들도 다종다양했다. 귀농귀촌인, 토박이, 산꾼, 시인, 도인, 스님, 수녀님, 히피(?), 아픈 사람, 백수, 뜨내기…. 느린 걸음과 느린 욕망이 자글자글한 사람들 틈에 섞여 탑돌이를 하듯 장터를 돌고 또 돌았다.
초여름의 태양은 이미 달아올랐다. 다리도 쉴 겸 장이 내려다보이는 찻집에서 멍한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모두가 걸어 다니는 생불로 보였다. 막걸리를 한 잔 걸친 탓일 것이다. 팬데믹 이전의 삶으로 회복되며 조금씩 활기를 찾아가는 모습에 가슴 저 어딘가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와 눈이 흐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화엄사로 가는 첫 버스를 탔다.
부처의 눈으로 보다
몇 해 전 홍매를 보러 왔었다. 보제루 옆을 스치며 돌았을 때, 눈이 부셨다.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눈을 감을 때 화엄사 흑매(꽃 색이 검어 흑매로 불리기도 한다)를 떠올리리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꽃만 보고 돌아갔기 때문에 이번 참에는 절의 전각 하나하나, 불상과 기물들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보기로 작정했다. 사경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직 6시간도 더 남아 있었다.
화장이라는 편액이 걸린 보제루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자 붉은 꽃이 지고 푸른 잎이 돋아난 매화나무는 청춘 같았다. 꽃이 보이지 않자 절의 중심 영역이 환히 보였다. 각황전 처마로 비둘기들이 날아들었다 날아 나왔다. 마치 절의 수호신처럼 하늘을 활공했고, 마당 한편에는 커다란 불두화가 흔들거렸다. 이른 아침 절집의 고요도 잠시, 템플스테이 복장의 보살 몇 분이 두 개의 탑이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사사자 삼층석탑을 향해 올라간다. 나는 대웅전에 참례하고 뒤로 난 소란한 대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었다.
‘천불이 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뜻일까?’ 하고 추측했는데, 구층암 천불보전에는 천 개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전각에는 수많은 연꽃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그 천 개의 불상 중에 나의 부처님이 한 분은 계실 것도 같았다.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으로 뒤돌아 세상을 보았다. 부처님을 만나면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줄 하나 긋는데
묵향 은은한 사경 강의실. 먼저 온 수강자들은 다소곳이 먹을 갈고 있었다. 가는 붓과 작은 벼루, 오늘 배울 사경 원본과 그 위에 덮인 하얗고 반투명한 얇은 화선지…. 나는 선생의 가르침을 화선지처럼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신선 같은 풍모의 김경호 원장은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이론 강의를 계속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절집을 순례하고 점심 공양을 막 하고 나서인지 졸음이 찾아왔다. 충분한 이유가 될 만하게 선생의 음성은 너무나 보드라웠다.
남은 시간 경전 한 글자는커녕 화선지에 테두리 선 한 줄 긋고 마쳤다. 선생과 선배들은 생초보의 줄긋기를 응원했고, 떨리는 손으로 그은 두 께가 들쭉날쭉한 줄 하나를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이런 뜻밖의 추앙을 다 받아보는군!
그날의 사경 원본은 ‘관세음보살보발수진언’이었다. 42수 중 이것은 뱃속의 모든 병고와 질병을 없애주는 진언이다. 산스크리스트어 진언을 한글, 한자로 옮긴 글자와, 그림으로 형상화한 수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강생들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기초로 일주일 동안 집에서 매일 매일 사경을 해와서 다음 주에 선생에게 점검을 받게 된다.
한 글자가 부처님
사경 수업을 마치고 템플스테이 연수국장인 성각 스님으로부터 화엄사 각황전과 화엄석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재의 각황전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숙종 때 재건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지어졌을 때는 장육전이라 칭했으며, 내벽을 화엄석경으로 장식 했다고 한다. 현재 화엄석경은 파편으로 남아 있는데, 화엄석경의 복원과 화엄사 전통사경원의 부활은 맥을 같이 하는 중요한 불사라는 설명이다.
김경호 사경원장은 5000명의 사경사가 함께 모여 사경 수행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사경은 지극정성과 전심전력으로 하는 붓끝으로 밀고 나가는 강도 높은 수행이다. 최고도의 정신집중으로 0.1mm의 선을 그어나가는 사경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라고 강의하는 김경호 원장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선생을 만나면 선생의 마음이 되어 본다.
각황전 뒤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적멸보궁과 또 하나의 국보인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고, 지리산을 배경으로 화엄사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화엄사는 절로 시각화한 경전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처음 빛으로 설법하셨다는 『화엄경』. 언젠가는 나도 꼭 사경하고 싶다는 원력을 세운다. 줄 하나 긋고 이런 큰 소망을 품게 하는 지리산과 화엄사는 뭔가 다른 차원의 장엄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