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아주 전형적인 한국 아재여서 그런지 저는 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끔 유명한 사극이나 있으면 몇 편 보다가 그만둘 뿐 여지껏 이렇다하게 정주행을 한 드라마는 한 손에도 다 꼽을듯 합니다. 그런데 얼마전 제 짝꿍이 정말 재미있다며 추천에 추천을 거듭하길래 못 이기는척 하고 시작한 드라마가 한 편 있는데요. 바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라는 드라마를 입니다. 예전에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드문드문 보면서 심심찮게 웃었던 기억이 나서 부담없이 1편을 시청했는데... 마약김밥은 혹시나 진짜 마약을 탄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볼 여지라도 있지, 이 드라마는 그럴 여지도 없으면서 얼마나 흡인력이 강하던지요.. 혹시 시각전달형 마약을 개발한건 아닐까요? 매 회 에피소드가 있고 웃음이 있고 기쁨과 슬픔이 있어서 우리들 사는 모습을 조그맣게 움추러뜨려 농축해 놓은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드라마를 좋아하는게 이전보다 여성호르몬이 더 많아졌다는 증거라는데.. 뭐 그런 생리학적 변화가 나이들면서 일어나는 당연한 신체의 매커니즘이라면 이 또한 조물주의 설계일테니 받아들일 밖에요. 이제 TV앞에 앉아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질 일만 남은 듯합니다. ^^
교육컬럼을 쓰면서 뜸금없이 드라마 이야기를 꺼낸것은 그 안에서 보았던 한 장면, 아니 한 노래의 가사 때문입니다. 절대로 지면을 잡아먹으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시즌 2의 어느 장면인가에서 남매로 등장하는 두 배우가 저녁 식탁앞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1990년대에 유행했던 DJ. DOC 라는 그룹의 노래입니다.
젓가락질 잘해야만 밥을 먹나요~ 이힛~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 잘 먹어요~
그런데 주위사람 내가 밥먹을 때 한마디씩 하죠
‘너 밥상에 불만있냐?’ ...
신나고 경쾌한 리듬에 맞춰 두 배우가 노래인듯 대사인듯 주고받는데 저도 예전 생각이 나서 발가락을 까닥거렸습니다. 정말 너무나 오랫만에 듣는 노래였는데 그 가사며 멜로디며 너무나 생생한 것이 마치 어제까지 매일매일 흥얼거리던 노래 같더군요. 다시 20대의 X 세대로 돌아간 느낌이랄까요? 어느새 이 ‘젓가락송’은 입에 착 달라붙어서 작업할 때도 흥얼거리고 음식할 때도 흥얼거리고 설겆이 할때도 흥얼거리는 노래가 되었습니다. 드라마를 다 마친후에도 말이지요. 그만큼 90년대 당시 이 노래의 파급력이 컷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소위 X 세대라 불리웠던 당시의 20대들에겐 전통이라 불리웠던 문화적인 규제와 사회 곳곳에 만연한 형식주의가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도 젓가락을 이상하게 잡네 마네.. 왼손을 쓰네 마네.. 회사 오는데 와이셔츠 색깔이 너무 튀네 마네.. 실질적인 과업의 완수에는 아무런 도움도, 혹은 지장도 되지않는 가지각색 규제들로 사방을 옥죄어오는 일들이 허다했으니까요. 제가 한국에서 회사다닐 때는 쉬는 토요일이라 해도 점심 어름쯤해서 빵과 우유를 챙겨들고 당직하는 동료를 방문하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팀장님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것이 직장생활 예의의 기본중 기본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하는 일 없이 자리 챙기고 앉아 시계만 바라봤었는지요. 그러다보니 DJ.DOC의 노래는 가슴 속 묵지근하게 쌓였던 쳇증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젊은이들의 희망사항과도 같은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노래에서 그리 큰 감흥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그저 추억어린 몇 소절이어서 흥얼거릴뿐 예전과 같이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불러재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치도 들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세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20여년전 세 악동으로 유명했던 DJ.DOC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주창하던 그 사회의 모습을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루었으니 그에 대한 갈증이 남았을리가 없는 것이지요. 이제 한국사회에서 젓가락질이 서투르다며 밥 잘먹는 아이에게 핀잔을 놓을 사람도 없고 청바지 입고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여름교복을 반바지로 만드는 학교들이 점차 늘어나고 사람들 눈 의식하지 않고 제멋에 겨워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관이 된지 오래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는 전체주의와 형식주의의 폐해를 타파함은 물론 더 나아가 실용주의와 개인주의의 범람속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개인주의적으로 변하다보니 간혹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사건 사고들이 왕왕 발생합니다. 얼마전 한 미국의 여성은 과체중인 자신을 항공사가 탑승하지 못하게 거부했다며 항공사를 고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바 있습니다. 자신은 미국의 합법적인 시민이며 따라서 해당 항공사를 이용할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모든 비용도 지불했으니 탑승거부는 명백한 불법이라는 논리이지요. 그러데 항공사의 입장 또한 강경합니다. 이코노미 클래스를 이용하기 위해선 지켜야 할 체중 상한선이 있는데 그녀의 체중은 그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탑승시킬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 내용도 항공권에 명시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체중제한은 당연한 안전규정입니다. 또한 옆자리의 승객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요. 비행기가 하늘에 떠있는 물체라서 무게배분에 민감하다는 사실과 주변 승객들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한다면 그녀의 분노가 턱없이 허무맹랑하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 우습지요. 이 이야기가 인터넷에 올라가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분노하며 댓글을 달았습니다. 항공사의 갑질을 규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지요. 승객들이 있어야 항공사가 존재하는데 승객을 무시했다면서 분노하고 그녀가 소송을 한다면 응원하겠노라며 편을 들고 승객의 체중까지 걸고 넘어지는 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며 분기탱천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체중으로 원하는 항공사의 원하는 클래스를 이용할 자유를 보장하라는 외침입니다. 솔직히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들이면 앞뒤 안가리고 이런 글들을 쏟아 놓을수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다보니 젓가락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올바른 젓가락질은 구시대의 유물이고 개인의 개성을 옭아묶는 폐단이기만 한 것일까요? 혹여 젓가락질이라는 문화형태가 우리에게 주는 속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보려면 우선 이러한 형식, 혹은 예절이 왜 생겨났는지부터 알아야 할거 같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젓가락은 중국의 장쑤성에서 출토되었다 합니다. 무언가 자연적인 재료를 가공해서 만들었다기보다는 그저 길쭉한 동물의 뼈 한쌍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는군요. 시기는 청동기시대 말기라 하니 한국으로치면 고조선 시대쯤 되겠습니다. 재미있는것은 최초의 젓가락이 사용된 용도입니다. 출토물의 정황을 볼때 그것이 음식을 집어먹기 위해 사용되기 보다는 요리를 위한 조리도구로 사용되었던듯 하답니다. 사실 요리좀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젓가락이 참 편리한 조리도구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젓가락은 요리를 위한 도구의 한 방편으로 발전을 했고 따라서 다분히 실용적인 측면을 고려해 발전해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말은 젓가락질이라는 형식조차도 어떻게 하면 두손이 아닌 한 손으로 막대 두개를 조작할수 있을까 하는 실용성의 고민에서 시작했다고 볼수 있겠지요. 어찌하면 막대기 끝에 힘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어찌하면 작고 둥근 물체까지 집어올릴 수 있을까? 어찌하면 최대한 멀리 잡고서 뜨거운 음식을 들어올릴 수 있을까? 이러한 다분히 실용적인 목적과 시도와 계산을 통해 전통적인 젓가락질이 완성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무형의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기 위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조작법을 전수했음이 당연합니다.
‘그렇게 쥐고 움직이면 힘이 없어서 소죽한 음식을 떨어뜨리게 된단다’
‘손가락 모양을 제대로 해야 미끄러운 국수나 동그란 콩도 집을 수 있는거란다’
이렇게 실용성을 중심으로 형식이 완성되었고 길고 긴 시간동안 변화하고 개선되면서 현대에 이르고 있는 겁니다. 결코 어떠한 형식의 올가미를 젊은 세대들에게 덮어씌워 그들을 묶어매려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실 이렇게 실용성을 중심으로 형식이 정형화되고 그 형식을 밑도 끝도없이 맹신하고 따라야하는 상황을 지금도 종종 찾아볼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라 한다면 운동의 기본포즈를 들수 있겠네요. 저는 골프 문외한 입니다만 골프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말씀하시더군요. 하체를 고정하고, 머리를 들지말고, 오른팔은 거들뿐.. 처음에 자세를 배우는게 가장 힘들지만 그래도 잘 배워야 거리도 잘 나오고 발전도 빠르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운동의 기본포즈는 긴 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변화를 주고 통계를 내고 연구를 하면서 이루어 낸 하나의 실용적인 형식입니다. 그러니 젓가락질이나 골프포즈나 같은 논리적 배경을 가진 같은 ‘실용적 형식주의’인데도 하나는 구태만연한 척결의 대상이고 하나는 충실히 따라야 할 기본자세가 되었으니.. 이 또한 재미있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물론 오랜시간을 거치며 예의범절의 틀을 덧씌워 지나치게 엄격해진 면도 없잖아 있겠지만 그 근본적인 목적과 의미만큼은 쉽사리 폄하할수 없을거 같습니다.
뉴질랜드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젓가락질과 같이 잘하자니 쉽지않고 무시하자니 곤혹스러운 형식주의가 하나 있습니다.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바로 NCEA 답안작성 요령이 그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그동안 매우 강력하게 NCEA과정의 폐단을 지적해왔고 심지어 무용론까지 펼쳐왔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컬럼을 쓸 때는 기록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워 조금 자중하는 편이지만 지인들과의 사적인 자리나 개인적인 상담을 할 때는 NCEA의 비합리적인 과정 디자인과 평가방법을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성토하고는 했습니다. 실제로 NCEA과정은 지금도 문제가 많고 특히 처음 시작할 무렵부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던 에세이방식의 시험은 평가의 효율성과 공정성, 학생의 적응용이성등에서 처참할 정도로 비효율적입니다. 내용이 어려운것이 아니라 시험보는 형식이 난해해서 쉬운 내용을 바탕으로 어려운 답을 만들어내야 하는 학생들의 고충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시험문제는 항상 거기서 거기.. 약간의 내용만 바뀌고 매년 문제은행에서 골라낸듯 비슷한 시험문제가 출제되고.. 학생들은 공부를 하는 대신 기출문제의 답을 외우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시험시기가 다가오면 기본 개념부터 적용 개념까지 정확한 설명과 연습을 시키기보다는 이런 문제에는 이 단어를 써야하고 저런 문제에는 이 문장이 꼭 들어가야 한다며 답안작성 요령을 가르쳐야 합니다. 속을 부글부글 끓여가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NCEA시험문제에 소소하지만 확실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여년동안 도외시되어 학교 선생님들은 수업조차도 하지 않던 내용이 중요 시험문제로 떡 하니 출제되는가하면 그동안 철통같이 고수해오던 ‘다른 챕터의 내용을 섞지 않고 해당 챕터의 내용만으로 문제를 만든다’는 원칙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개혁의 움직임이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긴 학교 선생님들조차 ‘에세이방식을 고집하다가는 NCEA는 망하고 말거라’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하시는 판국에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실제로 2020년과 2021년 과학과목 문제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흔적이 많이 보였습니다. 형평성을 위해서인지 아주 극단적인 변화를 주지는 않았지만 문제의 형식과 내용면에서 기존과는 사뭇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이대로 조금씩 변화해간다면 조만간 한 나라의 국가학력검정시험이라는 이름값은 할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NCEA 가 나름 노력하고 있으니 저도 조금은 추켜세워줘야 할거 같습니다. 그동안 비하하고 폄하한 만큼은 안되겠지만 그동안 단점에 가려져서 미처 드러나지 못했던 NCEA의 장점을 한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병은 실컷 줬으니 이젠 약도 한번쯤은 줄 때가 된거 같네요. ^^
학생의 학력증진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NCEA 장점 한가지는 바로 형식주의 입니다. 그렇습니다. NCEA의 가장 아픈 단점인 형식주의가 다른 한편으로 가장 우수한 장점입니다. 왜냐하면 Key word를 외우고 핵심문장을 외워야하는 학습의 방법은 문제의 소지가 많지만 그 내용 자체는 선별되고 정제되어 지극히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뜻도 모르고 달달 외우기만 해서 점수를 받았던 아이들이 고학년에 올라가서 그 뜻을 이해하고 학습에 적용하는 경우도 종종있습니다. NCEA가 제시하는 정답들은 마치 젓가락질과 같이 오랜시간동안 연구하고 학습해온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최적의 효율성을 위해 제시한 문장들입니다. 그것을 이상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교육부가 문제이지 내용 자체에는 하등 문제될 것도 제제할 부분도 없습니다. 사실 더 어려운 점은 이러한 학습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지도하고 양육하는 일입니다. 윗 학년 내용까지 미리 공부해서 답을 썼다고 실점처리하는 채점방법에 그저 웃을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같은 내용인데 다른 단어를 썼다고 감점당해서 억울해 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요? 하지만 그 친구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습니다.
형식이 제약이 되어 학습을 통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형식이 효율성과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 온 것이라면 그 내용만큼은 우리가 값지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젓가락질 잘 못해도 밥 먹는데는 하등 어려움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밥상위에 콩자반이 올라오는 날, 식구들이 행복하게 짜장면을 먹으러 가는 날.. 그 날이 오면 알게 될 겁니다.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