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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짐 풀어 놓고 뒤적 뒤적 들춰보니
국사님 가사장삼 다시 볼 수 없음메라
애답다 상사명령에 못 꺼내온 그 순간.
- ‘구하지 못한 보조 국사 가사 장삼’, 『인암 스님 시조선』
지금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온전히 남아 있는 많은 성보들은 한 줌 재가 되어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고려말 왜구의 약탈과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왜병들의 방화 등 온갖 전란과 재난 속에서도 수백 년간을 지켜 온 송광사의 성보들이었지만 ‘보조 국사의 가사와 장삼’처럼 1951년 부처님오신날 전날 일어난 방화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보물들도 있었다.
앞서 소개한 시조에서 저자였던 인암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화마에 휩싸인 박물관에 들어가 성보들을 구해내려 했지만 당시 주지스님의 만류로 보조 국사의 가사장삼 등은 미처 구하지 못했다.
만약 전란의 화마가 없었다면 하는 아쉬움과 회한이 남지만 그래도 스님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국보 ‘보조국사 목조삼존불감’과 보물 ‘경패’와 ‘경질’, ‘금동 요령’을 비롯한 수많은 성보를 지켜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송광사의 성보들이 더 소중하고 더 애틋한 마음이 든다.
송광사에는 국보 4점과 보물 27건, 전라남도유형문화재 10건 등 47건의 지정 문화재가 있다. 이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로 불리는 문화재가 있으니 천자암 쌍향수(천연기념물)와 능견난사(전남유형문화재), 비사리구시(비지정)가 있다.
이들 문화재 가운데 송광사 성보박물관의 보물 중 보물은 ‘목조삼존불감’과 ‘16국사 진영’, ‘화엄전 화엄경변상도’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성보들은 상설전과 특별전을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되고 있지만 이외에 보존 등의 문제로 인해 공개되지 않은 유물도 있으며, 국내 다른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성보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 백단나무로 8~9세기 즈음 조성된 목조삼존불감(국보)은 부처님오신날과 특별한 기간에만 공개된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송광사를 대표하는 성보인 목조삼존불감은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이 간직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단(白檀)나무로 만든 불감은 높이 14.5cm, 닫혀 있을 때의 폭 7cm로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다. 몸통은 8각 위는 둥글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생겼으며, 모두 3조각의 나무로 구성돼 있다.
불감 중앙은 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과 가섭 존자, 그리고 그 아래 연꽃을 들고 있는 2명의 보살이 조각돼 있다. 별도로 조각된 좌우 감실에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 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 보살과 권속들이 각각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불감 내부는 금박과 붉은색 등의 채색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겉면에는 옻칠과 금박으로 마감돼 있다.
▲ 경전을 감싸 보호했던 경질은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송광사만이 소장하고 있으며, 보존을 위해 일반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
목조삼존불감(국보)
송광사를 대표하는 성보인 목조삼존불감은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이 간직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백단(白檀)나무로 만든 불감은 높이 14.5cm, 닫혀 있을 때의 폭 7cm로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다. 몸통은 8각 위는 둥글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생겼으며, 모두 3조각의 나무로 구성돼 있다.
불감 중앙은 연화대 위에 앉아 있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과 가섭 존자, 그리고 그 아래 연꽃을 들고 있는 2명의 보살이 조각돼 있다. 별도로 조각된 좌우 감실에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 보살과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 보살과 권속들이 각각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불감 내부는 금박과 붉은색 등의 채색이 부분적으로 남아있으며, 겉면에는 옻칠과 금박으로 마감돼 있다.
▲ 상아와 흑단나무로 제작된 경패는 송광사만의 보물이다.
경패(보물)
경질로 경전을 감싼 뒤 나무나 금속 등으로 만든 이름표를 매달아 놓는데 이때 사용된 이름표가 바로 경패(經牌)다. 송광사에는 현재 상아로 만든 것이 10점, 흑단(黑檀)나무로 만든 것 33점이 있다.
『송광사지』에는 고려 원감 국사가 강화도에서 거란본 대장경을 옮겨 올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경패는 앞면에 불경의 이름과 경전이 들어 있는 상자의 번호를 새겼으며, 가장자리에는 꽃과 구름 등의 문양을 둘렀다.
상아로 만든 경패는 모두 투조(透彫)로 금강저와 용, 문창살을 제작하고 그 안에 신장과 보살상을 입체적으로 조각했는데 그 정교하고 세밀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흑단으로 만든 경패의 기본적인 구성은 상아와 동일한데 상아의 경우 금박으로만 장식했지만, 흑단은 금니(金泥)와 붉은색과 파란색 안료를 사용해 화려하게 꾸민 흔적이 남아 있다.
화엄경변상도(국보)
화엄경변상도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실 때 일곱 곳에서 아홉 번 설법을 하셨다는 ‘7처9회(七處九會)’를 함축적으로 요약해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불화다. 1770년에 화련(華蓮) 스님을 비롯한 12명의 승려 화가들이 무등산 안심사에서 그린 뒤 송광사 화엄전으로 옮겨 봉안했음을 화기(畵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단바탕에 그려진 세로 281cm, 가로 255cm의 화엄경변상도는 구름으로 7처9회의 설법 장면을 구분했으며 하늘에서 설법한 네 장면은 화면의 상단부에 2열로 배치하고 지상에서 행한 다섯 번의 설법은 하 단부에 역시 2열로 각각 배치했다. 그림의 아래쪽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선지식을 찾아 문답하는 장면이 하나하나 묘사돼 있다. 맨 아래에는 붉은 연꽃 위에 녹색 바탕의 공간에 ‘연화장세계도(蓮華藏世界圖)’가 그려져 있다. 중앙에 12각형의 원을 두고 그 안에 화장장엄세계해의 한복판에 있는 ‘무변묘화광향(無邊妙花光香)’ 향수해를 적었으며, 좌우에 그린 크고 작은 원안에도 무수한 향수해(香水海)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붉은색과 녹색, 파란색을 주로 사용해 정교하면서도 질서 있게 여러 부처와 보살을 그리고 법회 참가 대중들을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대각 국사의 교장(敎藏)
한때 속장경(續藏經)으로도 잘못 불렸던 교장은 고려 대각 국사가 한국은 물론 당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유통된 대장경의 연구 논문들을 모두 모아 간행한 것이다. 현재 송광사에는 『대반열반경소』 90, 『묘법연화경찬술』권1~2,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권제13~14, 『유가론소』등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교장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으며, 상당수는 제목만 전할 뿐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로 현재 송광사에는 20여 종이 넘게 남아 있다.
티벳문 법지(보물)
송광사 16국사 중 제6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스님이 1275년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의 청에 따라 충렬왕의 명으로 1275년(충렬왕 원년) 가을에 원나라를 방문했다가 귀국 길에 받아온 것으로 알려진 이 법지(法旨)는 가로 51.5cm, 세로 76.5cm의 두꺼운 종이에 쓰여 있다.
오랫 동안 이 법지에 쓴 글자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해 위구르어나 파스파문자 정도로 추측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면서 2001년 일본 등의 학자들과 함께 연구한 결과 원 세조가 발행한 국가적 명령문서임이 확인되었다.
훼손이 심해 전체적인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1273년 삼별초의 마지막 저항지 탐라(제주)를 토벌하려던 여몽연합군이 군량미 등을 조달할 목적으로 송광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원감국사가 이를 돌려받기 위해 원 세조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재산을 환수받은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은
“대웅보전에 들어가면 장대한 여러 보물들이 있는데 불아(佛牙, 순천 정혜사에서 이운해 온 정광여래의 치사리) 1쌍, 사리 1과와 세쪽으로 새겨진 원불(국보 목조삼존 불감)과 화엄경 아잠(상아 경패) 6매와 종려나무 껍질로 만든 욕실 신발(목욕혜) 1켤레와 옛 동발우(능견난사) 50층이 모두 영세의 보물이라.”
- 「연천옹 유산록」, 홍석주, 1828년
송광사 성보박물관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처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사찰박물관의 효시는 바로 송광사 성보박물관이다. 1828년 이전대웅보전의 불단 등에 성보를 전시한 것을 시작으로 1921년에는 대웅전에 작은 진열장을 설치해 전시했다. 이후 1936년 지금의 종무소 부근에 석회와 철사로 두껍게 벽을 만든 보물진열소와 그 옆에 연구실과 도서실을 새롭게 만들어 전시와 연구가 함께 이루어진 현대적 박물관이 탄생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박물관이 불에 타 많은 성보들이 소실되었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은 당시 스님들의 노력으로 중요한 성보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불에 탄 송광사를 복구하면서 스님들이 가장 먼저 시작했던 불사는 바로 박물관의 건립이었다. 1957년 10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59년 봄에 완공해 유물들을 전시, 보관할 수 있게 하였다. 이후 성보의 안전한 보관과 전시환경 개선을 위해 2017년 현재의 박물관을 완공하여 재개관했다. 박물관은 현재 연면적 2,877㎡의 규모로 수장고 3개실, 전시실, 학예연구실, 도서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