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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끝나갑니다.
벌써 2024년의 1/3를 넘겼고 이제 얼마지나지 않아 올해의 한 가운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뭐 한 일이 있다고 이렇게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나.. 가만히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자니 나오는건 한숨뿐이네요. 그냥 정신없이 바쁘게 살기는 했는데 뭐 하나 딱히 손에 꼽을만한게 없습니다. 마치 매일같이 분주하게 쓸고 닦고 했지만 잘해봐야 현상유지인 집안살림 같습니다. 그냥 더 나빠지지 않기위해 살았다고나 할까요. 공허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한거 같군요. 그런데 이런 삶의 공허함은 비단 어른들만의 전유물은 아닌듯합니다.
아직도 한참 미래를 꿈꾸며 행복해야 할 우리의 아이들도 매년 요맘때만 되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는 허무주의에 감염되어 ‘병고’를 겪기도 합니다. 바로 중간고사 때문입니다. 5월말에서 6월초 사이에 각 학교에서는 과목별, 혹은 전체적으로 연 중간고사를 실시합니다. 학년과 과정에 따라 이 시험의 중요도는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당연히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리고 집에서 먼 학교로 진학할수록 (그러니까 해외진학이 되겠지요 ^^) 중간고사의 성적이 중요해지지요.
목적한바에 걸맞는 성적을 받아들면 아무 염려가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예상에서 밑도는 성적을 받을라치면 아이들은 그야말로 죽을상을 지으며 괴로와합니다. 많은 생각이 들겠지요. 조금만 더 시간을 투자할 것을.. 조금만 더 자료를 찾아볼 것을.. 조금만 더 문제를 풀어볼 것을... 후회막심의 한계치를 경험하다가.. 때로는, 종국에 이르러, ‘포기’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표했던 학년말 점수를 포기하고, 지원하려던 대학교나 전공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인생을 걸고 이루고자 했던 삶의 목표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성적으로 내일의 입시가 결정되고 내일의 입시결과가 훗날의 직업으로 연결되는 현행 교육체계가 가지는 한계이자 아픔입니다. 물론 이런류의 작은 포기가 남은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류의 작은 포기가 남은 인생에 중요한 습관으로 자리잡는 경우는 허다하지요.
포기란 스스로가 목적한 바를 이룰 가능성이 희박할 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고자 하는 심리를 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체중계 숫자의 앞자리가 요지부동일 때.. 아무리 연습해도 노래방 점수가 80점대 초반을 넘지 못할 때.. 그리고 아무리 공부해도 Excellence가 머나먼 고지로만 느껴질 때.. 우리는 지치고 허무감을 느끼며 앞으로 더 쏟아부어야할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포기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포기에 적절하고 합당한 이유를 붙이게 되지요. 나는 체질이 원래 물만 먹어도 살찌는 스타일이어서 어쩔수가 없어... 나는 태어나기를 원래 음치로 태어났는데 80점만 받아도 잘 받은거지 뭐... 내 머리가 않좋은거는 이미 어릴때부터 알고 있었는데 이제와서 노력한다고 타고난 머리가 좋아지겠어? Merit만 받아도 감사한줄 알아야지..
그런데 말입니다. 한가지 생각해 볼게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할 때 추구하는 목표와 우리가 포기할 때 언급하는 목표의 수준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살을 빼기위해 다이어트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그냥 국민 평균치가 되는 것이었지만 다이어트를 포기할 때의 변명은 ‘내가 슈퍼모델이 될 것도 아니고..’ 입니다. 노래연습을 시작할 때의 목표는 ‘어디가서 노래 못한다는 소리는 안들을 정도가 되자’ 였는데 포기할 때의 변명은 ‘내가 가수될 것도 아니고..’가 되지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시작할 때의 목표는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였지만 포기할 때는 ‘내가 뭐 판검사 할것도 아닌데..’ 가 됩니다.
당연합니다. 무언가를 포기할 때의 변명은 매우 합당하고 객관적입니다. 당연히 슈퍼모델 할것도 아닌 사람이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래의 목표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슈퍼모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꿈이겠지만 국민 평균치의 체형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수는 못되어도 노래방 스타는 충분히 될 수 있고 판검사는 될 수 없다손 치더라도 대학졸업 후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는 있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포기에 대한 변명은 자신의 의지박약을 포장하는 그럴싸한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보면 고양이라도 그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호랑이를 그리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었건만, 붓 끝에서 살아나는 동물이 영 호랑이가 될 성 부르지 않을 때.. 우리에겐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포기하는 것이고 둘째는 차선책을 선택해 표범을 그리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차선책이었던 표범마저도 어려워진다면 목표는 강등되어 스라소니가 되고 그것도 안되면 고양이까지 하향 조정되는 겁니다. 어찌보면 이 모든 과정이 Level down의 연속이라서 시덥잖아 보일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호랑이를 향한 꿈이 좌절되었을 때 포기하는 것 보다는 훨씬 좋을 결과를 얻어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고양이를 그렸다하더라도 아무렇게나 구겨진 ‘그리다 만 호랑이’ 보다는 훨씬 가치가 있으니 말입니다.
포기는 0 으로 되 돌아가는 것 입니다. 무위입니다. 존재의 의미를 삭제하는 격이지요. 그러므로 호랑이를 그리려다보면 고양이라도 그린다는 속담은 절대로 무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임과 동시에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불굴의 정신을 전제로 한 서술이 되겠습니다. 그러고보니 윈스턴처칠이 옥스포드 졸업식에서 일갈했던 ‘Never give up’의 한 문장이 떠 오릅니다.
포기라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삶의 한 좌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조금 더 작은’ 성취를 묵살하는 행동이고 또한 의지박약의 증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포기를 입에 올립니다.
이번 시험은 망했어요. 그만해야 할거 같아요..
이번생은 망했어요. 희망이 없어요..
물론 진지하게 하는 말이 아닌 푸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이 말을 꼬투리삼아 계속 따져 묻다보면 어느새에 학생의 마음속에 깔려있던 포기의 또아리를 찾게 됩니다. 그냥 허탈감에 내뱉는 넋두리가 아니라 마음의 저변에 깔려있는 포기의 독기가 스물스물 비어져나오는 겁니다. 강금해 두었던 감옥의 걸쇠가 느슨해 진 때문이겠지요.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앞이 보이질 않아요..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아...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감 때문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을 보지못함으로 인해 포기에 한발짝 다가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이 아이들이 보고싶어하는, 바라봐야만 하는 대상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비젼과 자신감과 가치관이 응축된 스스로의 미래상일 겁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아이들을 절망하고 결국엔 포기하게 되는 거지요.
‘본다’ 라는 행동은 사뭇 과학적입니다. 무언가를 보고 그 형태와 색깔을 파악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판단하는 과정은 과학적 지식과 논리로 분명하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설명의 최초 시발점은 바로 눈 입니다.
2021년 일단의 독일 과학자들이 인간의 뇌세포를 배양해서 하나의 기능적인 뇌로 성장시키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거듭되는 실패를 거름삼아 도전하고 또 다시 도전한 끝에 결국 그들은 크기는 작지만 기본적인 학습기능을 발휘하는 소형 뇌를 배양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조금 더 클까 싶은 작은 뇌에서 과학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좁쌀 한 톨만큼 작은 점 두개가 생기는가 싶더니만 점점 자라서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시각기관이 된 것입니다. 완전한 형태의 눈으로까지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 모양으로 봤을 때 주변의 밝기 정도는 감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과학자들은 눈을 하나의 신체기관이 아닌 두뇌의 일부로 다시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눈은 두뇌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그 어떠한 조직이나 기관의 간섭이 없이 두뇌로 직접 전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이고 더 할 나위없이 정확한 이 시각정보는 가장 신뢰할만한 판단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보는것이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할 때 눈에 보이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믿습니다.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가격을 깍고 올리며 흥정을 하다가 결국엔 지갑속에 가득한 현금을 보여주면서 거래의 승기를 잡고, 평생을 함께 하고픈 아름다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선 한 무릎 꿇는 정중함보다는 팥알만한 다이아몬드 하나가 더 효과적이라 합니다. 역시 우리의 두 눈을 통해 수집된 정보야말로 가장 믿을만하고 가장 의미있는 정보인가 봅니다.
그러나
눈은 보이는 것만을 봅니다. 물질세계의 정확한 정보가 실상은 육체의 눈이 가진 한계입니다. 제 작은 동공을 통해 비집고 들어온 가시광선이 운송하는 정보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눈인 것이지요. 온전한 형체를 가진 사물이 반사해내는 빛이 없다면 육체의 눈은 제 구실을 해 낼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은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은 미움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눈은 아픔을 보지 못하고 기쁨을 보지 못하고 서러움을, 자존심을, 패배감을, 지혜로움을, 선량함을, 그리고 스스로의 자아상을 보지 못합니다. 인간의 삶에 너무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부분의 감정, 가치관, 의식의 흐름등을 인간의 생물학적인 눈은 도무지 감지해 내지 못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눈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자신의 성공적인 자아상 또한 육체적인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그것을 보아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의 아이들이 스스로가 이루어 낼 미래의 자아상을 현실의 그것처럼 목도하며 매혹되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인도해야 우리의 아이들이 ‘포기’는 배추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요?
▲ ‘코너 맥그리거’ 격투기 선수
‘코너 맥그리거’라는 격투기 선수가 있습니다. 한 때 UFC에서 세계 챔피언의 영광을 누렸던 선수라고 합니다. 저는 문외한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선수에 얽힌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코너 맥그리거가 20대 후반일 때 매일같이 반복되는 용접공의 일상에 지친 그는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용접공을 그만둔 뒤 운동에 매진하지요. 그러다가 자신을 후원할 한 팀을 찾아가서 면접을 보게되는 날, 그는 소위 말하는 짝퉁 명품시계를 하나 구입합니다. 그리고는 이후로도 이 시계를 보란듯이 착용하고 다니며 짝퉁 몸값을 과시하지요. 그 시계가 진품이었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이었을테니 말입니다. 훗날 맥그리거는 당시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다면 그런 흉내라도 내야만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렇게라도 미래의 내 모습을 가시화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렇게 힘든 훈련을 버텨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이 이루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으로 오늘을 사십시요. 그래야 그 꿈을 이룰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너 맥그리거는 무명선수시절 내내 스스로의 자아상에 매료되어 있었던 겁니다. 세계 챔피언이 되어서 당시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명품시계를 아무렇지 않게 차고다니는 모습을 말이지요.. 마치 무명시절의 ‘짐 캐리’가 천만불짜리 수표를 손으로 직접 그려서 지갑속에 넣고 다니며 시간 날때마다 꺼내봤다는 일화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은 보이는 것이 아닌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2018년 호주의 물리학자가 진행한 소립자실험에 의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이란 경험과 의지에 의해 제한되곤 합니다. 사실 보는것 뿐 아니라 듣고 냄새맡고 하는 모든 감각기관의 자극수용 메커니즘은 철저히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다시말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그 존재마저도 인식할 수 없으므로 무언가 새로운 대상이 등장할 때면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먼저 대상을 규정한 후 인식한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은 육체의 눈으로 볼 수없는,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볼수 있어야만 합니다. 코너 맥그리거와 같이, 그리고 짐 캐리와 같이, 미래의 나를 오늘의 시간, 오늘의 경험으로 소환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때론 그 능력이 의지이기도 하고 때로는 본능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늘 하루를 힘쓰고 애쓰며 살아나갈 이유가 되는 가치이고 내 인생을 송두리째 투척해서라도 이루고 싶은 모습이나 상황이며 동시에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이 긍정적고도 선명한 자아상은 내가 본디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해답이고 동시에 아직 발현하지 못한 내제된 능력의 증거가 됩니다.
눈앞에 자신의 미래상이 보이지 않을 때..
마음 한구석에서 포기의 먹구름이 스물스물 번져 나올때..
스스로의 성공적인 자아상을 매일 매일 다시 세워나가야만 합니다. 오늘 실패하고 실망하고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결국에는 꿈을 성취하는 자신의 본 모습을, 꿈을 이루기위해 태어난 자신의 모습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포기를 포기’하게 하는 가장 현명하고도 실제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올해의 초입에 세웠던 야심찬 목표가 맥없이 거꾸러졌다면.. 꿈꾸었던 삶의 지평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면.. 오르고 싶었던 고원의 능선을 도무지 오르지 못할거 같다면.. 이제 숨을 고르고 자신의 자아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요. 그리고 지금의 나와 미래의 또 다른 나를 하나로 엮어묶어 오늘을 사십시요. 포기를 포기하고 성취를 성취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