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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학부모님께서 이미 알고계시듯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사교육의 천국입니다. 대형입시학원은 말할것도 없고 입시학원 입학을 위한 또 다른 입시학원, 취업준비학원, 개업을 준비하는 학원 등등 별의 별 학원들이 다 있지요. 그 중에는 외국으로 조기유학을 다녀온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빠른 한국 교육과정을 따라잡기 위해 등록하는 학원들도 있는데요.
그 중 한 곳에서 재직하고 있는 한 지인으로 부터 뉴질랜드 유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남아 유학생들은 한국과 대등하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 더 높은 학력수준을 가지고 귀국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주 유럽권에 유학한 학생들은 많이 뒤쳐진 학력수준을 가지고 귀국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국 교과과정에 적응하기 가장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바로 뉴질랜드와 호주 유학생들이라는 이야기였죠. 호주 유학생들은 걸핏하면 학생으로서의 권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고 뉴질랜드 학생들은 너무 느려서 학습속도를 잘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좋게말하면 여유있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른 것이겠죠.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을테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귀국 유학생들을 지켜본 담당자의 말이라면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제게 재미있는 질문을 하나 하더군요. 뉴질랜드에서 유학을 한 학생들은 무언가를 배울 때 이것을 알아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시험에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를 선생님께 계속 질문하고 결정해 주기를 바라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면서 그 나라 교육시스템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지인이 보기엔 학생들의 학습 주체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였던 듯 합니다. 그저 피동적으로 이것 외우라고 하면 외우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따라서 하는... 과거 20여년전에 만연하던 한국형 주입식 암기 교육의 잔재를 뉴질랜드 학생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다소 당황스러운 결론을 접하게 되는데요.. 사실 이러한 교육형태는 그냥 그려려니 하고 지나치기에는 사뭇 중대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지식과 성적을 타인의 결정에 의존하는 자세에 다름 아니고, 스스로의 권익를 보장받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는 자세는 인간의 삶을 나태하고 부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제가 중국에서 잠시 무역업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20대말의 혈기 왕성하던 시절에 인생을 개척해 보겠다고 기염을 토하며 중국과 한국을 오가던 시절이 있었지요. 어느날 중국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조선족 직원과 같이 백두산 (장백산)의 산막을 향해 가던 길이었습니다. 당시 6시간동안 타고 가야할 기차는 의자에 쿠션조차 없는 허름한 기차여서 불편하기가 그지 없었는데요.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나고 나니 역무원이 무슨 큰 상자를 어깨에 메고 지나다니면서 돈을 지불하는 승객들에게 도시락통만한 물건을 건네주더군요. 저는 처음에 그게 정말 도시락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은 놀랍게도 장거리 여행을 하는 여객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한 소형 텔레비젼이더군요. 당시 한국에 네비게이션도 등장하기 전이었는데 휴대용 TV 임대 서비스라니요.. 게다가 중국에서 말이지요. 손바닥만한 흑백 브라운관 TV에 애들 머리통만한 배터리를 검은 고무줄로 꽁꽁 싸잡아 매어 놓은 ‘저개발 국가형’ 미디어기기는 임대비용이 꽤 고가였던듯 직원은 빌릴 엄두를 내지 않더군요. 중국어를 잘 모르는 저야 당연히 빌릴 이유가 없었구요. 그래도 심심할테니 대신 빌려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직원이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로반, 생각해보십쇼. 이 듕국이 어떤 나랍미까? 린민을 위한 린민공화국 아님까? 그렇다믄서 이러이 돈 있는 놈들만 저런 유흥을 누리게 하는건 말이 안되는 거 아입미까? 진정으로 린민의 권익을 위한다면 모든거이 다 똑같이 값이 없어야디요. 있으면 다 같이 있고! 없으면 다 같이 없고! 저는 그래야 진정한 린민의 낙원인거라 생각함다. 안그렇슴까?’
순간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중국에서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중국에 가면 공산당은 애증의 대상 그 자체이고 존멸의 대상 그 자체입니다. 자신이 기댈 곳이 필요하면 공산당이 최고이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비난의 화살을 쏟아붇는 대상이 공산당이지요. 물론 남 듣는데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한 동안 그런 이중적인 국민성에 진저리가 나 있던 차에 그 놈의 이기적인 태도를 접하게되니 정나미가 뚝 떨어져서 하품을 몇 번하고는 자는 척했던 적이 있습니다. 비용을 지불하고 TV를 빌릴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더 열심히 일을 하고 노력을 해서 그러한 경제적 여유를 누려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당연할진데 오히려 사회탓 정부탓을 하다니요.. 황당한 마음이 들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분 또한 사회구조의 피해자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합니다. 특별한 노력이 필요없이 당에서 하라는 일만 얼추 마쳐놓으면 생계가 보장되는 삶을 살아오다보니 진취성이나 창의력에 계발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지요.
그런데 무서운 것은 이 곳 뉴질랜드에도 당시의 중국과 같은 분위기가 퍼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구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육과정의 측면입니다.
얼마전 북쪽에 위치한 R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 학생이 볼멘 소리를 했습니다.
‘선생님.. 저 이번 인터널 시험에서 Merit받았어요. 그런데 정말 억울해요’
‘억울해요’ 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있기나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부에 관계없이 이 말이 전달하는 의미는 정확합니다. 이제 한 두번 겪어본 일이 아니라서요..
‘그래? 뭐가 억울한데?’
‘이번에 인터널에서요.. 그게 실험하는 거였거든요. 제가 결론을 쓰는데 ‘전선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전기 저항이 커진다’ 라고 썼는데 거기에 꼭 ‘비례’ 한다는 표현이 들어가야 한데요. 그런데 길이하고 전기저항하고 같이 증가하는 관계를 보여주는 그래프까지 그렸는데.. 그럼 답이 되는거 아닌가요? 왜 꼭 ‘비례’라는 단어가 문장에 들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그게 Excellence 포인트였어요..’
순간 마음이 또 갑갑해져서 한 숨만 푸욱 내 쉬는데, 옆에 앉아있던 친구가 불쑥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야.. 우리는 NCEA를 하는거잖아.. 그게 NCEA야..’
태어나 처음으로 NCEA 인터널 시험을 치른 아이..
잘 해보고 싶다며 그래프 그리는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물어보던 아이..
시험을 치르고 나서 정말 잘 봤다며 기뻐하던 아이..
그 아이는 이렇게 또 한명의 NCEA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앞으로는 어떻게든 기출문제의 정답을 달달 외워서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겠다 다짐하며 ‘맹목적 암기학습’의 신봉자가 된 것 이지요. 이런 학생들에게 창의적인 접근이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스스로의 창의력이나 진취성을 고무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아니 그렇게 해 봤자 손해만 보는 일의 연속이라 생각하며 오히려 거부한다면, 그것은 심하게 말해 ‘과학학습의 종말’에 진배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과학의 가장 첫 단추인 ‘왜?’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아니 지나친 비약임이 확실합니다만, 모범답안을 만들어 놓고 그에 맞추어 단어 하나하나를 끼워 맞추어 채점하는 NCEA의 평가법은 앞서 말한 사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는 중국 직원과 같은 가치관을 양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학습의 성공 여부가 학생이 얼마나 생각하고 공부하며 노력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시험 출제자가 원하는, 그리고 이미 정해놓은 그 답을 똑같이 적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면, 그렇게 느끼고 인지하고 훈련한다면, 결국 학생은 스스로의 학습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각각의 특정한 분야에 대한 답을 쓸 때 꼭 어떤 단어를 써야 하고 어떤 숫자를 적어야 하고 어쩐 문장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으니... 가르치는 저는 항상 답답하고 배우는 학생들은 항상 애처롭습니다.
Y11학생이 Y12에서 배우는 단어를 사용해 답을 썼기 때문에 그 내용이 지극히 정확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답처리 되고, 화석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대한 소개에서 few hundred year라는 답안은 상식적으로 너무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숫자이기 때문에 정답이고 ‘Very long time’는 문맥적으로 몇 만년을 뜻함에도 불구하고 숫자가 아니라서 오답이 됩니다.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된 두 수식사이의 관계는 글자로 씌여진 문장이 아니어서 오답이고, 전선의 길이가 증가할수록 전기저항이 증가한다는 설명은 ‘비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오답이라 합니다. 이렇게 한번 또 한번 스스로의 노력이 가치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과정을 겪어가며 아이들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갑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나요? 지금 가르쳐 주시는 내용은 아주 잘 이해하겠지만 이 내용이 시험에 출제가 되는 내용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답을 어떻게 써야 감점을 면할수 있을까요?
서글픈 현실입니다. 분명 누군가의 개인적인 관점이 반영되었을 채점 기준에 맞추어 논리 명확한 자신의 정답을 그들의 정답으로 잘라 맞추면서 아이들은 어떠한 인격적 성장을 경험하게 될까요?
인간에게 보편적인 권리, 안전한 거주의 권리나 건강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듯 학생들에게도 학생으로서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외압이나 편견, 차별을 경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독려되어야 하듯 학생들에게도 그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권장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애석하게도.. 너무 많은 경우에 아이들은 그 반대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마치 가족을 부양할 생계비를 벌기위해 애쓰고 노력해서 객관적으로 납득할만한 성과를 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의 한 문장이 고용주의 마음과 달라서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과도 같습니다. 과연 이런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억울’ 하다는 표현 말고 또 다른 어떤 표현으로 그 갑갑한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런일이 되풀이 된다면 예전의 그 직원처럼 아예 도전과 노력이라는 진취적 자세를 영영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2003년 이후 지난 20여년간 NCEA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그리고 2024년의 Y11학생들을 대상으로 또 한번의 ‘상전벽해’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음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저의 소견에는, 과학과목에 한해서는, 또 한번의 개악일뿐 개선의 실마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대안학교의 교과과정을 떠 올리게 하는 인터널 챕터들과 한층 강력해진 에세이 기반의 익스터널 시험문제들.
물론 나아진 부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개선을 상쇄하고도 남을 새로이 부가된 부적절함. 과학과목을 한 해만 공부하고 끝낼것도 아닌데 다음 학년과의 연계성이 극도로 낮은 내용구성. 아마도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Y12에 새 시스템을 적용하는 시점이 2028년으로 미루어진게 아닐까 추측합니다만.. 누가 알까요. 완전히 취소 될런지.. 덕분에 올해 Y11학생들만 새 시스템에 맞추느라 고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내년 Y12에 올라가서 기존의 Y12과정에 적응하느라 또 다른 고생을 해야 할 겁니다.
솔직히 아무리 변화를 준다고 노력하여도 작금의 키워드방식 채점기준이 개선되지 않는 한 급격한 난이도의 수직상승도, 다양한 연령대의 출제위원 구성도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NCEA 과정상의 최상급 시험인 국가 장학금 시험에는 여타의 시험과는 조금 다른 평가방식이 적용됩니다. 각각의 문제에 대해 모범답안과 같은 예시가 등장하고 키워드와 핵심문장이 있는 것은 동일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답안에 대해 부분점수를 부여하는 합리성이 적용됩니다. 더구나 핵심 키워드가 없으면 득점을 못한다거나 하는 어불성설도 존재하지 않구요.
저의 개인적인 바람은 이런 장학금 시험의 평가방식을 모든 NCEA 시험에 적용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현재의 에세이 시험방식을 철폐하는 것이겠지만 그게 당장 될수 없다면 차선책이라도 따라야 할 테니까요.
바라기는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보다는 조금 덜 억울하고 조금 더 인정받는 교육제도안에서 창의적이고 진취적 어른으로 성장하여, 문제의 본질을 객관적인 관점으로 분석하고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건전하고 건강한 ‘학습권리 향유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