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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연식의 ‘다시 조선으로’, 조형근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지난여름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문학의 역할에 관한 서한을 발표했다. 각기 번호를 붙인 44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이 글에서 교황은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문학의 정의입니다”라고 적었다.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간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 예술과 역사의 근본적인 주제이다.
이즈음 이연식의 ‘다시 조선으로’와 조형근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를 읽으며 문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어떤 역사책은 소설 이상으로 그 시대를 통과한 인간의 복잡다단한 마음과 운명의 행로를 생생하게 조감한다. 이 두권의 책이 그랬다. ‘다시 조선으로’와 ‘콰이강의 다리…’는 거대 담론과 연대기 중심의 역사에 익숙했던 독자들에게 실제 그 시대의 풍속과 역사적 감각,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한껏 불러일으킨다.
이 책들을 통해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충무로 일대 극장가에서는 카우보이 서부극의 인기가 대단”했으며, “한반도 출신의 젊은이 1000여명이 태국-버마 철도 건설 현장”인 콰이강의 다리에서 일본군 휘하의 포로 감시원 노릇을 수행했다는 사실이 환기된다.
해방 직후 있었던 “명월관과 국일관의 포르노 상영 사건”이 지닌 정치·문화적 맥락과 “적과의 싸움에 목숨을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는 통한의 정념이 서술된다.
이외에도 지금까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과 에피소드가 두권의 책에서 문학작품 못지않은 몰입력으로 펼쳐진다. 이런 역사적 사실과 일화에 기반한 이야기는 그 시대를 소재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의욕적인 작가에게 창조적 영감과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리라.
이연식은 “우리는 해방 후 돌아온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타지에 남은 이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 또한 살피지 못했다”고 적었고, 조형근은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고 기술했다.
과연 그렇다. 우리가 충분히 헤아리고 보살피지 못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 타자에게 가한 상처들이 존재한다. 역사적 무관심과 폭력은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귀환하기 마련이다.
이런 시야에서 보면 소설화될 수 있는 근현대사의 스토리가 무궁무진하다. 가령 해방 직후 돌아온 조국의 착잡한 현실에 절망해 만주로 되돌아가거나 일본으로 다시 밀항할 수밖에 없었던 귀환자들의 내면은 아직 충분하게 미적으로 구현되지 않았다. 문학이나 예술의 입장에서 역사를 안다는 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상처와 욕망을 최대한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작업과 통한다.
격동기의 연말이다. 새로운 희망과 비전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시기일수록 지금의 한국을 낳은 역사적 뿌리로 소급해 이 시대의 야만을 차분히 응시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앞의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다. “독서는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다시 조선으로’와 ‘콰이강의 다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일화와 사건을 통해 이 시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역사의 장면을 면밀하게 살피고 해석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때로 독서는 시대의 우울을 통과하며 새로운 희망을 일구기 위한 나침반이 된다.
* 출처: 한겨레
■ 권 성우 : 숙명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