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영혼의 지팡이(Ⅱ)-Secret Sunshine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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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007. 16:51
KoreaTimes ()
여우난골에서 온 편지
며칠 전 도마질을 하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나는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둘둘 감았다. 다정한 이들은 내 손가락을 보고 틀림없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어머! 다치셨네요. 많이 아프셨겠어요. 쯧쯧.”사실 나는 손가락보다 마음이 더 쓰리고 아렸었다. 그래서 우울해 하다가 정신이 산란해지면서 헛 칼질을 하고 손을 베었던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피해망상증 환자가 아니던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준 일은 까맣게 몰라도 내가 상처받은 일은 예민하게 감지한다. 만약 우리네 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다면 그 '마음'들은 전쟁터의 야전병원처럼 아비규환, 처참한 꼴들이 아닐까. 쓰러지고 부러지고 찢어지고 비틀거리고 피흘리고---그래도 누구 하나 아는 체 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지 않으면 다행이다.
“돈을 못 벌면 밤일이라도 잘하든지--- .”
“내가 왜 당신하고 결혼했는지 모르겠어. 선봤던 치과 의사랑 결혼했으면 내가 이렇게 지지리 궁상떨면서 안 살텐데---.”
“당신 친구들은(식구들은) 왜 다그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남자들은 이렇게 화살을 쏘아 댈 것이다.
“배둘레햄! 내가 사람이랑 사냐 돼지랑 사냐?”
“애가 당신 닮아서 그 모양이지.”
“당신, 처녀 때 헤어스타일 줌 해 봐.”
“황신혜 몸매 죽이더라. 마흔이 넘었는데---당신하고 나이 비슷하지?”
“집에서 하는 일이 뭐야?”
“단돈 000도 모아놓지 못했단 말야?”
싸이코 멍청이 쓰레기---어떤 때는 내가 입은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방이 입기 바라면서 고약한 말들을 곰곰 생각해서 상처 입히기에 골몰한다. 인간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다.
“잘 키울게요.”
남편의 애인이 찾아와 건넨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놓고 몸만 빠져 나온 여자. 침착하고 나지막이 건네진 협상의 말이었지만 여자의 가슴엔 비수가 꽂혔다. 피 흘리는 상처보다 내출혈이 더 위험하다. 말 뿐이 아니다. 무시하는 듯한 눈빛, 배려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 이기적인 행동 등이 모두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
올해, 60회 칸느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의 '밀양'을 보았다. 나는 오클랜드 국제 영화제 때 '밀양'이 오려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대신 '채터레이 부인'을 보았다. 그 섭섭함을 알았는지 비디오가 곧 출시되었다. 전도연! 연기를 하고 있다는 계산을 전혀 관객에게 들키지 않는 배우,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천연덕스런 배우, 미인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질리지 않는 배우, 성형수술로 엇비슷해진 여배우들 틈에서 밤톨처럼 야무진 얼굴을 장점으로 살린 그녀다. 그녀는 순박한 시골처녀(내 마음의 풍금, 인어아가씨), 세련된 도시 여자(접속, 약속), 약간은 퇴폐적인 흑장미 같은 여자(너는 내 운명), 요조숙녀(스캔들) 등 소녀 처녀 아줌마, 현대극 사극을 두루 넘나드는 배우다. '천의 얼굴을 가진'이란 수식어도 웬지 그녀 앞에선 꾸민 말 같다. 그저 그녀는 우리 친구, 이모, 선후배같은 여자다.
밀양(密陽)-남편이 사고로 죽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 고향에 내려온 신애(전도연 분). 그 아들마저 유괴되어 주검으로 발견된다. 인간이 받는 상처 중 가장 처참한, 자식 먼저 앞세운 상처가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 신애가 사과를 먹다가 칼로 손목을 긋는다. 목울대가 모두 불끈 서는 장면은 고통의 정점이다. 넘지 못할 상처, 고통은 죽음으로써 이겨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들이 판치는 세상에 무거운 바윗돌 같은 화두를 툭 던져 놓는다. 관객의 비위나 눈치를 보지 않고, 상업적으로 계산하지 않은, 뚝심있는 그의 작품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오르탕스 블루의 시 '사막'>
사막을 걷는 듯한 인생살이는 상처와 고통으로만 점철되어 있는가. 이감독은 그의 전작 '오아시스'에서 '희망'도 보여 주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있는 법!
신애가 가슴 속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용서하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이다. 생각은 쉽지만 마음은 고삐 풀린 말처럼 뜻대로 가 주질 않는다. 반드시 누군가의 하염없는 위로와 한풀이가 필요하다. 종찬(송강호 분)은 신애가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멀쩡하거나 미치거나, 항상 같은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그 여자를 봐주는 남자다. 종찬은 오아시스며 Secret Sunshine, 즉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아주 비밀스럽게 다가온다. 나를 일으켜 줄 영혼의 지팡이, 살아갈 의미를 던져 주는 한 줄기 희망이 어디서 스며드는가. 고개를 들어보라. 고맙게도 햇살 좋은 여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