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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한해를 보내는 길목에서 올 한해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게된다. 그리고 어쩌면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 견디며 살았구나 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2019년을 보내며 언제나 그러했듯이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남겨질 것이다.
얼마전 20대 중반 한창 꽃다운 나이에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이 낯설은 곳으로 삶의 현장을 옮겨와 정신없이 40년을 산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린 나이가 아닌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부모님과 함께 이민와 직장을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식당에서 청소를 하거나 접시를 닦으며 시간제로 일하면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부모님께선 작은 가게를 시작하셨다.
이렇게 몇 년을 흘려보내면서 아버지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하시던 가게를 정리하신 후 약간의 돈을 주시며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 하셨다.
그 돈을 가지고 작은 가게를 열고 정신없이 일하는 중에 결혼해 두딸을 낳았고 어머니께서 육아와 살림을 맡아주셨기에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이들이 중학교를 갈 때까지 쉬지않고 일을 해 융자없이 집도 사고 가게도 제법 자리를 잘 잡았지만 남편을 챙기지를 못했다. 10년이상 함께 살면서 감기조차도 잘 걸리지 않았던 남편이었고 항상 웃으며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남편이었기에 몸에 이상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남편이 소화가 잘 안되고 가끔 설사도 하면서 점점 살이 빠지기 시작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남편이 “괜찮아, 별일 아니야” 하기에 걱정은 되었지만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남편이 배를 움켜쥐며 너무 아파하기에 응급실을 갔다.
몇 가지 검사 후 “아무래도 입원해 좀 더 살펴봐야겠다”는 의사의 말에 남편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때만 해도 ‘설마 남편한테 무슨 일이 있겠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얼마 가지않아 청천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듯 충격적인 소리, 즉 남편은 “췌장암 말기로 얼마나 오래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을지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하루 시간이 흘러가면서 남편은 점점 식사를 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면역력 또한 떨어지기 시작해 “그 어떤 특별한 치료를 시작할 수도 없고 혹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처음 병원에 올 때만 해도 곧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결국 남편은 몇 달간의 투병 생활을 견디다 아내와 두딸을 뒤로 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남편을 떠나 보내고 어머니와 두딸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또 다시 흘러간 10년이 넘는 시간 속에 딸들은 공부를 마치고 직장 생활을 하며 독립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제 손녀를 키우시며 살림을 맡아 해주셨던 어머니를 조금 편하게 해드릴 수 있겠다’ 할 때 어머니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의 모든 수고를 다하셨다.
하루에 몇 개비 안되는 담배를 수십년간 피워오셨던 어머니는 한 갑 이상 담배를 피우는 딸에게 “나는 담배를 끊지 못했지만 넌 담배를 끊었으면 좋겠다” 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 말씀을 제대로 새겨 듣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해결할 길이 없다”며 계속 담배를 피웠다.
이렇게 ‘자리잡고 살기 위해 정신없이 일하면서 남편의 건강을 그리고 어머니의 건강을 돌보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어머니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다’, ‘무엇이든지 다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님이 돌아가신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담배를 한 갑이상 피웠는데 얼마전 호흡기계에 문제가 생기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숨쉬는 것이 너무 힘들고 담배를 끊지 않으면 상태는 더 나빠질 것이라 하기에 30년이 넘도록 단 한번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금연을 며칠 전 시작했다.
이처럼 ‘그렇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라는 생각 속에 후회와 아쉬움을 남긴다면 2020년은 어떻게 준비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