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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서 그런지 전화도 울지를 않고 띠리링거리는 이메일숫자도 반으로 줄었다. 다들 벌써 휴가를 간 모양이다. 평소에는 점심시간도 거르기 일쑤지만 간만에 느긋한 모닝커피 타임을 가지며 커피잔 한손에 쥐고 헤럴드로 네이버로 이런저런 기사거리들 사이로 헤엄쳐 다니다가 배민(배달의 민족)이가 독일기업에 무려 5조원이라는 가격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에 커피를 뿜을 뻔 했다. 5천만원만 되도 나에게는 큰 돈인데 5조라니... 이게 공이 몇개가 붙어야 되는거임?
배달앱을 시작한지 10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IT기업 M&A 로서는 최대 매각액을 찍은 이 당돌한 기업의 대표에게 관심이 쏠렸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스스로 기술로 음식문화, 경험을 새롭게 디자인 한다며 “경영하는 디자이너”이라 부르는 그에 관련된 기사들을 읽어나가다 보니 이 사람의 어머니 또는 아내가 궁금해 졌다. 생각의 자유와 소신을 지키는 책임감 그리고 생각한 꿈을 무한반복의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는 패기는 누군가 옆에서 믿어주고 격려해 주지 않으면 지켜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가장 어렵다 생각되는 부분은 육체적인 노동시간도 아니고 금전적으로 드는 부담감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이겨내야 하는 스트레스도 아니다. 문득문득 나를 가장 어렵게 하고 두렵게 까지 하는 것은 내가 이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고 있느냐는 나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발명왕 에디슨, 링컨 대통령, 정트리오, 김연아 선수 등등의 위대한 인물이나 스타들의 이면에는 늘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남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그들의 천성적인 재능과 꿈을 일찍 발견하거나 남들은 장애라 생각하는 부분들을 장애 대신 재주로 키워낸 어머니들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우리엄마들은 모두 “얘는 천잰가봐~~” 라고 말하는 시기를 거친다. 뭐든 내 아이가 처음 하는 거는 신통방통하고 남다른거 같기도 하고 기특해서 나오는 탄성이다.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어른들의 규격화된 생각의 뒤주속에 갇혀서 사도세자 처럼 사라져 갔을까?
아들아이가 인터에 막 들어선 무렵이었던 거 같다.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았는지 해제를 하고 늦은 시간까지 컴퓨터를 하고 앉아있는 아이에게 (그무렵 내가 MS 윈도우 패밀리 프로그램으로 설정해놓은 컴퓨터 자동 전원차단은 평일은 8시 주말엔 10까지였고, 시간도 평일에 3시간이 맥스 주말에는 5시간이 맥스였다) “Can we have a talk?” 하고 시작된 대화. 그날의 대화에서 나는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를 하듯 머리에서 괘종을 울리는것 같은 알람을 들었고 가끔 내가 제대로 잘 키우고 있는거 맞나 하고 나자신의 판단에 의문이 들때 그날의 대화를 상기하곤한다.
그날 한시간동안의 긴 대화를 했고 남북정상회담보다 조심스러웠던 틴에이저 아들과의 협상은 컴퓨터의 Lock은 없애되 본인들이 스스로 적당히 쓰고 알아서 관리하는 자율성에 성적유지의 책임감을 별책부록으로 얹어서 가져갔다. 이 대화에서 내가 얻은 진리는 내 아이들은 나와 다른 세기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애들이 컴퓨터에 앉아 있을때 단 한번도 “공부하고 있구나” “뭔가 궁금한걸 알아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컴퓨터 = 게임 이었다.
꼭 책을 보고 노트에 써야만 공부라고 생각하는거 자체를 버리라고 말해주던 아들녀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엄마한테 예전엔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녔으니 엄마더러 내가 자동차 대신에 수레를 타고 다녀야 한다고 하면 엄만 어떨거 같아?”
그렇다. 나는 내가 공부하던 방식 내가 학교 생활하던 방식에 갇혀서 정작 요즘애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놀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날 이후 부터 나의 교육방식은 180도로 바뀌었고 지금껏 그리 후회스러운 적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씩 내가 미처 보지 못한것이 없나 늘 생각하고 움직이는 엄마로 살려고 노력한다.
부모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기다림의 마라토너가 되어있다. 뒤집기를 하고 구르고 기고 걷고 뛰고 말하고 그림을 그리고 학교에 가고 어른이 되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하고 또 아이를 낳고. 그렇게 한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끊임없이 기다려 주고 또 기다려 주며 응원해야 하는 마라토너다. 그 각각의 아이들이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아이들의 다름을 읽어낼 줄 아는 현명한 부모가 되어주자.
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三十而立 서른 살에 자립하였고,
四十而不惑 마흔 살에 事理에 의혹하지 않았고,
五十而知天命 쉰 살에 천명을 알았고,
六十而耳順하고 예순 살에 귀로 들으면 그대로 이해되었고,
七十而從心所欲하되 不踰矩
일흔 살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도
法度에 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