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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한 주택가에 눈매가 날카로운 청년들 7명이 서 있었습니다. 초조해보이는 모습들이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시간이 지나 해거름녁, 노쇄한 프러시안블루로 축 늘어진 남미의 하늘을 배경으로 한 중년신사가 퇴근길을 재촉하며 걸어옵니다. 그가 예의 7명을 알아보았을 때.. 순간 주춤 발을 멈추는듯 했으나 이내 이전의 터덜거리는 리듬을 되 찾았습니다. 다만 가방을 든 손이 부들거리는 것만은 어쩔수가 없었지요. 7명은 별 어려움없이 일개 회사원인 그를 납치했고 그는 별 저항없이 처음보는 7명의 납치에 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리카르도 클레멘트’. 현 건설회사 직원입니다.
그의 예전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전 나치 유태인 학살 담당자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1945년 나치가 패망한 이후 유태인 학살의 주범중 한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은 전범 수용소를 탈출해 신분을 세탁한 후 남미로 도주했습니다. 그리고는 장장 15년간 서독과 이스라엘 정보부의 눈을 피해 조용히 숨어살았던 것이지요. 오랜 추적끝에 아이히만의 신원을 확인한 이스라엘의 정보부 ‘모사드’는 그를 납치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합법적인 아르헨티나 국민이었으니 그를 납치하는 것은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리카르도와 아이히만이 동일인물임을 증명해가며 길고도 긴 법적절차를 밟아갈수는 없었기에 이스라엘은 국가간의 분쟁을 각오한 채 그를 납치해오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납치 다음해인 1961년 4월 11일.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9개월간의 심문을 통해 확보한 증거를 바탕으로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저는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제 의지로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군인과 공무원으로서, 히틀러를 비롯한 여타 상급자의 어떠한 지시에도 가감없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유태인 대량학살에 관여한 일은 자신의 직접적 의지가 아니었고 그저 군인과 공무원으로서 행정적인 업무를 한 것 뿐이었다고 항변한 것입니다. 확실히 그는 그의 맡은바 책임을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독일과 인근 점령국에 거주하는 1100만의 유태인 ‘학살 대상자’ 들을 파악하고 그들에 대한‘최종해결책’을 강구해 기안했으며 ‘가스실 열차’ 제작을 진두지휘해 더욱 효율적인 600만 홀로코스트를 주도했으니.. 복지부동하기 딱 좋은 군인겸 공무원으로선 더 이상 성실할수 없고 더 이상 충성적일수 없었다 하겠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가 이렇게 말했을까요.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승전국은 독일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56일간 진행되었던 재판결과 아이히만은 당연히 사형을 언도받았고 (당시 사형제도가 없었던 이스라엘에서 특별법을 제정하면서 까지) 다음 해 5월 31일에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는 한 줌의 재가되어 지중해의 공해상에 뿌려졌지만 그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했던 진술들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라는 저서로 유명세를 탔던 ‘한나 아렌트’도 있었습니다. 독일계 유대인이며 동시에 정치철학자였던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 그의 진술을 바탕으로 누군가의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절대적인 악이 될수 있다는 논지의 책을 쓴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평범한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유태인과 집시를 포함하여 1000만이 넘는 일반인들을 ‘인종청소’ 라는 이름으로 멸절시킨 학살자치고는 너무 평범하고 소박해서, 그의 모습이 연기인지 진실인지 고민스러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아이히만이 납치된 후 그와 같은 동네에 살던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침착하고 지적이었으며 선하고 따듯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되었으니 아렌트박사의 당황스러움도 충분히 이해가 될법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받은 충격과, 자신이 ‘범생이 공무원’ 이었을 뿐이라는 아이히만의 진술은 한나 아렌트 박사로 하여금 ‘부당한 목적을 추구하는 성실함이 얼마나 야만적일수 있으며 목적의 적법함을 고민하지 않는 무지함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깨닫도록 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각성의 결과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인 것이지요.
사실 아이히만의 법정진술은 형량을 줄이기위해 스스로의 자존심을 내팽개친 고육지책일수도 있었습니다. 일의 목적과 일의 파급력이라는 두가지의 지성적, 양심적 성찰은 안중에도 없이 ‘군인의 신분으로서 그저 최고 주권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다’ 라는 그의 변명은 스스로에게 일말의 양심과 지성조차 없었다는 수치스러운 자기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러한 비양심과 무지의 정치사조를 전 독일인에게 전파했음을 시인하는 것이기도 하니 주변인들에게 지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그의 변명으로는 그리 정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이 솔직한 느낌입니다. 아마 사실이 그러하지는 않았을겁니다. 왜 그라고 집단학살의 비도덕성을 몰랐으며 인종간의 계급주의가 시대역행적 발상이라는 사실을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었기에 그 모든 인간적인 지성의 힘은 잠시 접어두었음이 분명합니다. 그의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은 이러한 몰염치에서 비롯된 집단이기주의의 정수라 부를만 한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관점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의 적법성을 도외시한 성실이 야기한 악’ 이라는 그녀의 논지는 아이히만의 고의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게으름이 악이라 규정될 수 있는 것처럼 성실과 노력도 때로는 악이라 규정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목적과 방항이 선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만약 범죄자가 자신만의 개인적인 목적에 의해 매우 성실하게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악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매우 합당한 개인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책임에 게으름을 피웠다면 그것이 악으로 평가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행위에 대한 올바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성실함과 게으름을 우선하는 선결과제라 말할수 있겠습니다. 논어의 한 구절 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 은 인생과 활동에 있어서 올바로 된 목표를 설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이히만의 사례처럼, 목적에 대한 무지가 역사에 길이남을 만행을 낳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목적에 대한 무지가 인생에 길이남을 부끄러움의 이유를 낳는 경우는 우리의 주변에도 비일비재한 듯합니다. 특히 10대 중후반의 얄팍한 지성으로 인생과 우주를 논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주로 찾아 볼 수 있겠는데요.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보다 영어가 훨씬 유창했던 시절에는 한 해에 다섯명 안쪽으로 키위학생들을 가르치곤 했었습니다. 그 동네도 엄마들 입소문으로 모든일이 해결된다는 걸 나중에 알고나서‘엄마만사형통’의 만국공통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간간히 중국학생들이나 받을까 키위학생들은 한 명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몇 년전의 사고에서 기인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가장 큰 이유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제가 의도적으로 키위학생들을 줄여나갔던 것도 그에 못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아마 그들을 가르치며 경험했던 답답함 때문에 해방구를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모두다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저만 우연히 그런 학생들을 만났던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제가 경험한 키위학생들은 정말로 변명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그렇게 창의적이고 집요한지 깜짝깜짝 놀랄정도로 주변인들을 비난해가며 자신이 숙제을 할 수 없었음을 변명하고 그러다가 정 말문이 막히면 숙제를 정확하게 리마인드 해 주지 않았다며 화살을 저에게 돌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네버 에버, 스스로를 피고인석에 앉히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수업에 임하고 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턱이 없지요. 그들의 변명중에 제가 제일 싫어했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물론 상습적일 때에 한해서 말이지요.
‘I tried.’
단 두단어로 이루어진 이 한 문장은 정말 많은 사연과 관계와 주장과 뻔뻔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학생의 의무는 도전하는 것이지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 나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묶여 숙제를 못했지만 그 이유까지 당신에게 말하긴 싫다.
- 난 한마디로 공부하기 싫다.
- 어려워보여서 숙제는 그냥 한 번 읽어보기만 했다.
- 당신은 내가 돈주고 고용한 사람이다. 내가 갑이다. 자꾸 피곤하게 하지마라.
- 난 이정도의 문제는 풀지 못한다. 그렇게 태어났다. 바꾸려하지 말아라.
참으로 여러가지 발칙한 생각들을 품고 있는 짧은 문장입니다만 이것은 사실 변명이라기보다는 진실에 가까울 겁니다. 매우 아전인수격인 진실인 것이지요. 처음엔 저도 잘 타일러보려 했으나 아이들의 요따위 재수없는 반응들에 기분이 언짢아지기 다반사여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가 그때 그 아이들과 다시 만날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하나같이 귀를 틀어막고 사는지...ㅎㅎ
그것은 공부의 목적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왜 그토록 하기 싫은 공부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사회적인 공익성을 떠나 한 개인에게 있어서 공부가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었습니다. 끈기라고는 ‘기름에 볶은 안남미’ 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학생들이 공부의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음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공부는 논리의 확인과 학습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 논리는 교과서의 페이지 사이에 녹아있을 수도 있고, 공부를 하는 과정의 심리적인 압박을 통해 구현될 수도 있고, 공부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언행에서 발현될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논리는 꾸준함이 동반되었을 때에야 학습가능합니다. 숙제 한번 쭈욱 훑어보고는 잘 모르겠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문제를 붙들고 늘어져서 기어이 해결하고 말았을 때의 보람과 새로이 열려진 논리의 신세계에 감탄할 기회를 포기하는 처사입니다.
또한 공부라는 것이 ‘고민을 통해 성장해가는 자신의 논리력’을 위해 존재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처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동기부여도, 노력도, 인내심도 결국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는 단 한가지의 논리를 경험케하고 확신케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I tried but no good.’ ‘I was born like this.’ ‘You don’t get to tell me what to do or what not to do.’라고 지껄여대는 것은 ‘나는 태어난대로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허용되는 성장만을 이루다가 죽을테니 나에게 발전이라는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주장하며 벽창호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가끔 학생들이 묻습니다. 벌써 이십년 가까운 시간동안 수없이 설명하고 설명했건만 해가 바뀌면 새얼굴인 아이들은 언제나 불만이고 언제나 궁금합니다
‘선생님. 지금 공부하는 이거요.. 나중에 써먹지도 못할건데 도대체 왜 배워야 해요?’
이젠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대답만 모아도 유튜브 채널을 반년은 돌릴만큼 익숙한 질문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하도 많이 듣다보니 요즘들어 그에 대한 대답이 점점 더 날카로와져 가는 듯 합니다. 제 답변의 2020년 버젼은 이렇습니다.
‘나중에 써 먹지도 못한다고? 거 참 웃기는 소리인걸~~?’
그렇습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우습게 느껴질만큼 질문의 포인트가 빗나가 있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학생은 공부의 목적을 지식의 습득으로 간주했고 그래서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리거나 구닥다리가 될 작금의 초등지식을 이렇게 열심히 이해하고 암기하고 정리하는 것이 무슨의미가 있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습습니다. 공부의 정확한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우습지만 이제껏 아무도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것이 더 우습습니다.
공부의 목적이 논리의 습득과 반복연습을 통한 훈련이라는 것을 모른체 무조건 성실하게 무조건 열심히 달려왔을 아이의 땀방울이 우스우리만치 안타깝습니다. 학습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에, 답을 도출하는 것만이 학습의 목표라고 생각했기에, 틀린 논리가 아닌 틀린 답을 안타까워하며 제 머리를 쥐어박았을 절망이 속상하고 그래서 우습습니다.
공부의 목표는 기실 논리의 습득에 있습니다. 쉬게말해 덜 똑똑하던 아이가 똑똑한 아이로 변해가는 과정이 공부입니다. 보이지 않던 현실의 뒷면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논리적 전개를 배우는 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고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나중에 써 먹지도 못한다... 한번 생각해 볼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고등학교에서 배운 미적분과 시 한편을 써먹을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양자역학과 산염기 개념을 활용할만한 상황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겁니다. A학점으로 졸업을 하던 겨우겨우 턱걸이로 졸업을 하던 사회인으로 살아가는데에는 하등 다를일이 없을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성인이 되어 인생을 경작하다보면 공부를 잘 했던 친구들이 세상을 좀 더 수월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되니 말입니다. 내가 쓴 보고서는 퇴짜맞기 일쑤인데 친구가 쓴 보고서는 칭찬을 듣습니다. 사내 아이디어 공모전을 하며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도 그 친구는 상금을 거머쥐고 내 아이디어는 쓰레기통에 처박힙니다. 친구는 뭘 하나해도 똑 부러진다며 어딜가나 칭찬 일색이고 나는 뭘 하나 하려면 제발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것이라며 손사레 만발입니다. 하다못해 미팅을 나가도 친구는 너무 재밋게 얘기를 잘한다며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내가 간만에 입을 열어 농담이라도 하나 날리면 이후 2분 30초 동안 남극 펭귄 대행진을 감상할 기회가 생깁니다.
물론 학력과 성적에 관계없이 더 큰 부를 축적하고 더 높은 명예를 이루어가는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소위 ‘운때가 잘 맞아서’ 기가막인 인생역전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런 차이들은 모두 다 논리의 유재와 부재라는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학습될 수 있습니다. 아니 뚜렷한 목표를 세운 학습과정 이외에는 논리력을 성장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인류역사에 ‘교육’이 태동한 이래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는 ‘독서량 - 논리력 절대비례의 법칙’이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린 자녀들의 교육 일순위는 독서입니다. 독서클럽도 만들고 읽기 선생님을 초빙하기도 하고 요즘엔 심지어 책을 읽어주는 인터넷 서비스도 등장해서 활황리에 운영되고 있습니다. 왜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직접 체험해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 어떠한 반응이 있을 수 있으며 나는 그중에 누구와 가장 유사하게 반응할 것인가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물을 찾다가 원주민들에게 붙잡힌다던가, 신발 한켤레를 사기위해 온가족이 한달 동안 돈을 모아야하는 경제공황을 겪는다던가 하는 위험부담이 없이 가장 확률이 높은 생존의 논리를 은연중에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책읽기이기 때문인 것 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대사회 고등교육의 핵심입니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크게 두가지의 영역을 공부합니다.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입니다.
인문학에는 생각보다 많은 논리적 서술들이 등장합니다. 굳이 그리스시대의 ‘수사학’과 ‘소피스트’ 들을 들먹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세상에는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의 생각을 설파할 논리체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기에 교육과정도 그에 맞추어 진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현실적으로 왠만한 현대인들은 자신 고유의 논증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분들이라면 변증법, 대화법, 문답법... 등등의 고급 수사기교를 사용해 어느 누구와도 논리 싸움에서도 지지않을 자신이 있다며 으스댈수도 있습니다.
저같이 횡설수설 중언부언하는 사람에겐 부럽고도 부러운 능력이 아닐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엔 딱 두가지의 논리만이 존재하고 (고등학생 수준에서) 저의 경우 그 두가지 논리에만 젖어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다보니 어느정도 사고의 획일화가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메마르고 건조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 되겠고, 두마디로 누군지 모르지만 와이프는 참 재미없게 살겠다 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ㅎㅎ
제가 가르치는 자연과학의 영역에 존재하는 두가지 논리는 인과의 논리와 시간의 논리 입니다. 이것이 이러하면 저것은 당연히 그러하다.. 라는 당위성이‘인과’의 논리이고, 현재는 이렇지만 추세를 고려해 볼때 미래엔 저렇게 변할것이다.. 라는 추론이 ‘시간’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 두가지의 논리적인 사고를 통해 생활에서 접하는 거의 모든 물질적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등학교 과학교육의 목표 또한 이 두가지 논리를 습득케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음이 당연하고 이를 위해 관찰, 가정, 분석, 계산, 증명, 확인, 해설, 평가 등등의 여러 활동들을 활용합니다. 이렇게 교육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 나를 괴롭히던 기출문제가 왜 있어야만 했던 것인지, 선생님은 왜 성적에도 관계없는 실험보고서를 쓰라며 속을 썩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젠 이해가 됩니다. 왜냐하면 교육의 목적은 문제 잘 풀어서 고득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배우고 연습해 인생에 적용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자녀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시는 부모님들이 계십니다. 제가 굉장히 반대하는 충고입니다.
‘죽으라고 공부하면 안될게 없다!’
‘죽을 각오로 덤벼들면 성공하게 되어 있다!’
몇 번 쓴 적이 있습니다만 죽으라고 공부하다가 진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잘 살기위해 공부하는거니까 살려고 공부를 해야하겠죠. 잘 살기위해, 목표하는 인생의 결과물을 손에 쥐기위해, 나와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기위해, 올바른 공부의 목적을 확실히 인지한 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우리의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적도 모른채 표류하는 마음으로 책상머리에 앉아있다고 설마 아이히만같은 역사적 만행을 저지르게 되지야 않겠지만, 그의 맹목적인 성실함에 의해 희생되었던 유태인들처럼 맹목적인 노력에 의해 아이들의 인생이 곤경에 처할수도 있음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