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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끝자락에 유럽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방문해 보고 싶었던 곳이 바로 그리스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유명한 올림푸스 산의 신전을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 말 그대로 압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4대 고대 문명 발상지로서의 위상과 함께 드라마 소설 영화의 탄탄한 기본 스토리로 헐리우드에서 무한 반복되는 그리스 신화이다. 우리는 흔히 밝히거나 공개하면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는 사안을 비유할 때 ‘판도라의 상자’ 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는 최초의 여성으로 지상으로 내려가기 전에 남신들과 여신들로 부터 선물들을 받게 된다. 그녀는 제우스에게서 판도라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와 더불어 절대 그 상자를 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판도라라는 이름은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으로 신들이 그녀에게 선물을 준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판도라는 사실 프로메테우스를 비롯한 인간들이 불을 훔친 것에 화가 난 제우스의 또 다른 벌이었다. 제우스는 이미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어두고 독수리로 하여금 그의 간을 쪼아먹도록 하는 벌을 내렸다. 후에 지상에 내려와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 생활 도중 결국 호기심을 이겨내지 못한 판도라는 제우스의 경고를 잊고 그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 있던 모든 질병, 슬픔, 가난, 전쟁, 증오 등의 모든 악이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는 상자를 닫았고 맨 아래에 있던 ‘희망’ 만이 상자에 남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인간들은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되었지만 희망만을 잃지 않게 되었다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판도라 상자 이야기의 핵심인 ‘희망’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 상자에 남은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원하는 헛된 희망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전자는 ‘희망’의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 되고 후자는 ‘기대’라는 의미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희망과 기대는 의미의 유사성으로 인해 종종 혼동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희망은 내부에 기인한 긍정적인 태도이다. 반면 기대는 일종의 상태이며 기대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나 외부 상황에 달려있다. 흔히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이 있어도 희망이 크면 실망이 크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얼마 전 유일한 혈육이라고는 쉰을 바라보는 아들이 전부인 할머니를 도와 드리게 되었다. 이미 청소년 시절부터 시작된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폭력은 통제를 벗어난지 이미 오래였고 신체 및 언어 폭력을 견디다 못한 할머니는 자신의 집을 놔둔 채 모텔을 전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들은 자신의 행위를 폭력이라 인정하지 않고 경찰의 개입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심지어 할머니 예금을 자기 마음대로 술과 도박에 탕진하고 있었다. 장기간 노출된 폭력으로 인해 불안장애와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할머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언젠가는 좋은 아들로 개과천선해서 유일한 혈육인 노모를 모시고 한집에서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는 35년째 진행형인 믿음이었다. 이 할머니의 사연을 통해 희망과 기대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쉽게 행복의 잣대를 내부의 태도 보다는 외부의 상태나 상황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며 살아가는 것 같다. 가장 빠르게 불행해지는 방법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라는 인지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송봉모님의 시 <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가 희망과 기대의 차이를 잘 설명해 주는 듯 하다.
배우자나 자녀한테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지녀야 한다
기대는 나를 위한 것이고
희망은 상대를 위한 것이다.
또 한번 나를 뒤돌아 보게 된다.
<새움터 장요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