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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란 요물인지 괴물인지가 사람들 발을 묶어 바쁜 생활인들을 일시에 집 안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이제 모두가 지쳐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더러 길에 나다니는 사람들은 입을 막고 말을 잃은 벙어리 신세입니다.
모처럼 반가운 누구를 만났어도 정답게 포옹 할 수도 없습니다. 악수조차 못하고 눈만 껌벅이며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로 좁아진 대단한 21세기 문명 사회에서 도대체 무슨 이변입니까? 형체조차 알 수 없는 그 것에 대항하는 사람이 없군요. 너무나도 재미없는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언제 끝난다는 마감도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그렇더라도 삶은 계속돼야 하기에 희망의 끈을 놓치면 안되겠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웃음을 찾기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전(戰) 후의 불안정 속에서 너나없이 살아가기 힘든 50년대였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도 좋은 직장을 잡아서 집을 떠나 있게 되었습니다.
D시에 새로 생긴 대회사였는데 기숙사 시설이 특히 우수했습니다. 불편함 없는 여건에서 근무를 하며 집생각 같은건 하지도 않았습니다.
꿈이 마냥 무르익는 20대 청춘, 제 인생의 황금기가 바로 그 때였던 것으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눈덮인 하얀겨울, 푸른 잔솔잎에 얹힌 흰눈 꽃송이 송이가 눈이 부시게 아름답던 회사 정원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어느 겨울, 지독한 감기에 몸살까지, 병가를 얻어 집에 올라와 얼마간 쉬고있을 때 였습니다.
며칠 후, 한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동료 K가 휴일을 이용해 나를 만나러 상경하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어머니는 먼데서 딸의 손님이 온다고 집안 대청소도 하고 반찬준비도 해야 한다며 수선을 떨었습니다.
혹시 사윗감이나 아닐지? 지레짐작으로 서두르는게 느껴져 괜스레 웃음이 나왔지요. 떡 줄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 때 우리집은 노량진쪽 C동. 방 세칸짜리 옛날 한옥이었습니다. 그나마 부엌 아랫방은 세를 주어서 방 두개로 궁색한터였지요.
어머니는 시장에서 등이 시퍼렇게 물좋은 생선, 아지를 넉넉히 사 오셨어요. 고등어보단 덜 비리고 얕은 맛이 있는 생선이었습니다. 살점을 포떠서 불고기 양념으로 석쇠에 구우면 그 맛이 고기보다 부드럽고 감칠맛이 더 좋아서 우리집에선 자주 해 먹는 별식이기도 했습니다. 회를 쳐도 좋을만큼 물이 싱싱할 때라야 그 맛을 제대로 볼 수가 있음은 물론이지요.
당일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저녁 설거질을 마친 어머니가 졸임준비가 된 냄비를 들고 퇴방으로 나갔습니다. 부엌에서 끓이면 집 안에 냄새가 베인다며 풍로에 숯불을 피웠습니다. 시퍼렇게 불꽃이 일다가 바알갛게 수그러든 불위에 냄비를 올려 놓았어요. 미리 끓여 놓아야 간이 들어서 맛이 있다는 정성스러움이었습니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딸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지없이 고마웠습니다. 조금 들떠있는 듯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게 그리 기분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딸들을 시집 보내면서 어머니의 그 때 기분을 이해했습니다.
“궤발 물어 던진듯이 혼자서 객지가 왠 말이냐”
어머니 특유의 그리움을 호소하는 문구였습니다. 편지마다 적어보내는 그 그리움을 참 오래도 버텨낸 모진 딸이었지요. 일을 마친 어머니가 물 묻은 손을 닦으며 안방으로 들어가신 후에도. 동생들은 샐샐거리며 장난들 치느라 잠을 잃은 듯 했습니다.
“그만 놀고 자자’
그 밤. 식구들이 잠들려는 찰나였습니다.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려왔어요. 잠든 줄 알았던 막내 동생이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누나 고양이가 왔나봐.... 냄새맡고... 생선 다 먹으면 어떡해”
(냄비가 아직 덜 식어서 뜨거울텐데 고양이가?..) 가벼운 불안과 두려움같은게 몸을 사리게 했습니다. 모두들 긴장해서 조용했어요. 문득 달빛 빗겨든 환한 창호지 문에 설핏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습니다. 겁이 덜컥 났어요. 일어나지지가 않더라구요.
살금살금 앉은 걸음으로 창문곁에 바짝 붙어 앉았죠. 손톱만큼 찢긴 틈새로 눈을 들이댔습니다.
(맙소사)... 동생들은 불안과 궁금증이 뒤섞인 눈초리로 누나만 바라보고 있었죠. 한 손에는 접시를,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든 남자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고 있더군요. 그 뒷모습을 낮같이 환한 달빛이 거침없이 비쳐주고 있었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실실 웃음이 나오다가 갑자기 풋! 하고 큰웃음이 터져나왔어요.
“너무 웃긴다. 고양이보다 엄청 큰 짐승에게 생선 한토막을 도둑 맞았어 ...”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한바탕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깔깔거렸습니다. 아랫방 돌스님 짓이라는 걸 동생들이 금방 알아차렸어요. 웃어 죽는다며 배를 잡고 뒹굴었습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니 ...”
그가 기이한 짓을 하는 사람임을 동생들은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정상에서 10%쯤 부족한 것 같다고 했어요.
큰 길 고개위에 자그마한 암자가 있는데 사절(私寺)이라고 했습니다. 그 절 주지스님이 그 사람 형님이라는데 그들은 대처승이어서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어요. 그 남자도 작은 스님이라고 하더군요. 공부를 더 하려고 그렇게 혼자 지내는 것이라는데 그런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사람이니까 피접을 시킨 모양 같았어요.
언니 집에 놀러온 동생 사돈 처녀를 건드려서 어쩔수 없이 결혼을 시켰답니다. 그러니까 언니 동생 친자매가 시집 동서지간이 된거지요.
매일 절 일에 매달려살면서 남편의 특별한 뒷바라질까지, 그 아내의 삶이 고달프고 불행해 보였습니다. 곱게생긴 얼굴에 웃음을 잃고 항상 어둠이 덮여있어 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아이를 업고 먹을 걸 날라오고 빨아온 옷보따리도 챙겨 힘겹게 들고 다녔습니다. 부부라고 마주서서 따뜻하게 대화하는 모습도 본적이 없습니다. 도둑맞은 엉뚱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이라고 생각되어 너무 불쌍했습니다.
어떤 때는 방 안에서 물을 퍼 날라 버리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데 아마 좁은 방 안에 목욕통도 있는 모양입니다.
어머니는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젊은 여인을 바라보면서 입속으로 “쯔쯔... 불쌍한 것”하며 애처로워 하셨습니다.
“새우젓 사아려~~”
골목에 새우젓 장사가 지나가면 옷 을 되는대로 걸친 남자가 성급하게 신발을 끌며 나옵니다. 손에 사발을 들고 두리번거리는 다급한 모습이며 그 몰골이 참으로 꼴불견이였어요.
새우젓을 사들고 번개처럼 방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 스님이라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시지.
“꾀가 있으면 절에 가서 젓국을 얻어 먹는단다’
어렸을 때, 멍청한 짓 하면 어머니께서 지청구 주던 말이 생각 났습니다. 아하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확실히 깨달았지요.
스님이면 산에 살아야지 민가에 있으니 얼마나 어렵겠냐며 부모님들께서는 늘 못본 척해 주라고 당부 하셨습니다.
그 때는 생각없이 웃읍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이 제 입지를 알고 바르게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한번 깨우쳐보게 됩니다.
거실에 나와보니 추녀끝에 조롱조롱 맑은 수정 구슬이 눈부시게 곱군요. 보슬비가 소리없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목련이 활짝 피었는가 했는데 어느새 꽃을 떨구고 있어요.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
들풀은 여전히 싱그럽고 세상은 다름없이 아름답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 수밖에 없지만 어쩌겠습니까?
코로나가 아무리 위협을 할지라도 내가 몸담은 이 세상. 다시 정신차려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꽁꽁묶인 긴장과 두려움의 나사 한두개쯤 풀어 보려구요.
그 하얀 여백을 행복 바이러스 웃음으로 채우고 싶습니다. 웃기에만도 부족한 우리들 인생이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