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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넘버 3’의 삼류킬러 송강호는 부하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면서 홍수환이 챔피언이 되고 임춘애가 금메달을 딴 것이 라면을 먹고 운동한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개천에서 용(龍) 났다’는 것인데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이 매우 열악한 사람이 불가능할 것 같은 업적을 이루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성공하는 경우를 빗댄 속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천(開川)에서 용(龍)이 나는 것은 과거에도 힘들었고 다양한 산업과 시장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도 계층, 계급 간의 이동은 무척 어렵고 드문 일이다.
한국 재벌가 사람들의 기호와 사생활은 베일에 싸여 있다.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한국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이건희 회장은 평소 자택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여름엔 사무실 인근 맛집에서 콩국수를 주문해 먹었다고 한다. 애주가인 정몽구 현대차 그룹 회장은 평소 막걸리를 즐기며 다음날 아침엔 대부분 라면으로 해장을 한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최고의 부자들이지만 음식만은 서민의 메뉴를 선호한 것이다. ‘돌고 도는 게 돈’이란 말처럼 재벌이 항상 행복하거나 그들의 부유함이 영원하지는 않다. 가정불화나 유산소송, 건강의 문제처럼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고통이나 불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라면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다. 1963년 말에 삼양라면이 처음 출시된 이후로 한국인에게 라면은 음식 이상의 그 무엇이다. 꼬불꼬불하게 구부러진 국숫발만큼이나 제 각각의 사연이 배어있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시절 허기와 공복감을 채워주던 라면은 현재 기호품으로 바뀌면서 맛도 종류도 변천을 거듭했다. 한국 성인 10명 중 6명은 1주일에 한번 이상 먹고 라면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인기가 대단할 만큼 김치나 불고기처럼 한류 브랜드의 한 장르가 되었다. 짧은 시간에 요리할 수 있는 라면이 가장 많이 소비되는 두 나라가 전쟁 이후의 가난과 고도 성장이라는 같은 역사를 경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후 세대들이 절박한 생존 투쟁의 삶을 살았고 그 덕분에 오늘의 한국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현 세대들에게 선배세대가 경험했던 헝그리 정신을 강요할 순 없다.
라면의 레시피는 세계인구 만큼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기본은 물의 양과 불의 세기가 관건이다. MSG가 없고 방부제가 포함되지 않은 현재의 라면 면발은 이미 익혀서 건조된 상태이기 때문에 센 불에 빠르게 끓여야 먹는 동안 불지 않고 쫄깃함을 유지할 수 있다. 수학에 정석이 있듯이 라면의 정석이 있다. 그건 바로 라면 봉지 뒤에 적혀 있는 조리법. 가장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60년 가까이 연구한 연구원들의 비밀 조리법이다. 1. 물 550ml에 건더기 스프를 넣고 물을 끓인다. 2. 분말 스프를 넣고 면을 넣은 후 4분간 더 끓인다. 3. 김치, 달걀 등을 곁들여 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 라면 석학들이 수십수만개의 라면을 끓여서 만든 궁극의 레시피 그 기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이다.
와인을 먹고 싶어서 라면을 끓인 날이 있다. 누구에게나 해장라면 하나쯤은 특별한 레시피가 있지 않은가. 우선 파와 고추를 약불에 볶아서 기름을 낸 후에 라면을 봉지 레시피 대로 끓인다. 신의 한수는 지금부터다. 마지막 1분을 남긴 후에 액젓을 반 수저 넣고 잘 익은 토마토를 하나 썰어 넣거나 같은 분량의 토마토 소스를 넣어준다. 그리고 불을 끈 후에 숙주를 잘게 채 썬 것을 한 움큼 넣고 30초 정도 뚜껑을 닫아 둔다. 씹을 때 살아있는 아삭한 식감이 죽음이다. 토마토 라면에 후추향이 살짝 느껴지는 저렴하고 가벼운 쉬라즈 한잔 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해박한 지식으로 만드는 와인과 음식의 궁합도 좋겠지만 완벽하진 않아도 가끔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도해 보는 느낌은 설레임이다. 라면에 김치가 최상의 궁합이듯이 진정한 마리아주는 나의 끊임없는 경험에 의해 완성된다. 라면에 어울리는 와인은 정확한 답이 없다. 이것이 마리아주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하나하나의 만남과 경험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면서 당신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하기도 한다.
뭐니뭐니 해도 역시 라면의 완성은 얼큰한 국물이다. 면을 맛볼 때는 면발이 끊기지 않도록 단전에 힘을 끌어모아 한 번에 흡입하자. 꼬불거리는 면발의 탱탱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와 함께 먹는 라면은 한국의 힘을 느끼게 하는 뿌듯한 맛이다. 역시 라면에 김치는 진리다. 달걀은 풀지 않고 그대로 넣어야 국물이 텁텁해지지 않고 면에 들러붙지 않아 면의 쫄깃함을 방해하지 않는다. 뭉근하게 익은 반숙 달걀이 입안을 포근하게 감싸온다. 역시 마무리는 남은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어야 완성된다. 라면의 화룡점정은 역시 찬밥이다.
국민들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던 또 한 명의 정치인이 독방에 재수감되었다. 이로서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들 모두가 전직 대통령의 예우를 박탈당했다. 그는 극빈층에서 대그룹사장, 국회의원, 서울시장에서 대통령이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개천에서 용(龍)난 케이스다. 그가 개천용들의 소울푸드인 라면을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은 ‘한입만’ 하고 뺏어 먹는 라면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묻어 버리고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라는 속담은 바로 개천에서 난 용(龍)이 타락한 경우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재화의 정의로운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가진 자만이 더욱 많이 가질 수 있는 세상에선 개천에서 용(龍)나는 기회는 더 이상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