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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안을 외면하려 작정하고 헤어졌지만 집으로 돌아와 며칠밤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고민과 갈등에 휩싸였다.
곧 졸업을 하고 사회에 발을 디딜 준비를 해야할 시기에 말도 안되는 짓을 한다는 생각과 시대의 흐름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감상적인 이끌림 사이에서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머리속으로는 잘난체 그만하고 부모님 생각하고 현실을 직시하라 말하지만 내 가슴은 젊은시절 뜨거운 피를 억지로 식히려 하지마라! 현실과 타협말아라!
인생 한번 살지 두번사는가? 맞아죽더라도 큰 칼에 맞아죽자! 라고 속삭였다. 사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지만 결국 나는 가슴이 당기는대로 행동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먹고 나니 뒤돌아 보지 않는 내 성격대로 단순하게 화끈하게 가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시간과 결단의 순간이었다.
대책없이 저지르고 보는 무모함이 나의 단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자책을 하지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잘한 선택이었다.
일주일후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하고 그를 만났다. “일을 합시다 내가 할수 있는 만큼 돕겠다” 더이상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와 나는 그날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형제의 우애와 동지의 맹세를 서로 나누었다.
스물넷 피끓는 청춘의 열정이 폭팔하기 직전에 그를 만났고 내 열정을 쏟아부을 마당이 펼쳐진것이다.
선거때 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그 이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스스로의 합리적 명분을 만들어 놓고 더이상 갈등은 허공에 날려버렸다.
그날이후 나는 거의 매일 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첫날에는 그가 존경하는 재야인사이자 멘토인 김상찬선생을 만났다.(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선생은 온화한 미소와 넉넉한 덕담으로 우리를 따뜻이 맞아주었고 식사후 차를 마시면서 그의 젊은시절 군부독재와 투쟁하던 시간들과 중앙정보부에서 고문받던 일들 그리고 현재 부산 재야운동 확장의 필요성을 국어선생님처름 편안하게 / 담담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 이후 지금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시민운동의 대부 배다지선생, 한겨레 연구소 전갑수씨 등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특이하게 기억이 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홍과 정판사라 불리는 두사람이다.
전홍은 주로 노동집회에서 투쟁을 했고 현장에서는 항상 전위에 섰던 인물이다 . 체격이나 인상이 무척 강인해보였고 대화중에도 강직하고 원칙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울산 현대조선 파업현장에서 연설을 마치고 내려올 때 그가 직접 뺨을 때렸다는 말을 선배로부터 들었다. (지금 부터 그를 선배라 부르겠다)
그가 뺨을 때린 이유는 “노무현당신이 언제부터 노동운동을 했다고 갑자기 언론의 스포트를 받고 노동운동의 스타가 되서 현장을 휘젓고 다니는가?”
그 모습이 아니꼬웠던것이다. 분위기로 보면 노동운동의 한참 선배격인 자신들과 인사도 하고 서로 소통을 해야 하는데 노무현 성격이 어디 그럴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들소처름 달리기만 했을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전홍이 총대를 메고 손을 봤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황당한 소식이지만 그 당시는 이런일들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를 만났을 때 이 사건에 관한 사실관계를 물어봤지만 그는 단순히 인정만하고 자세한 설명은 피해버렸다.
또 한사람은 정판사라 불리는 인물인데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사람이 드물었고 사는 곳도 분명하지 않은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직업은 노동자였지만 흥미롭게도 일반판사 못지않게 법률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부러 법에 대해 물어보면 막히지않고 형법 몇조 몇항 조문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곤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정판사로 기억한다.
겉으로 보면 옆집의 사람좋은 형처럼 친절하고 따뜻했다.
그러나 시위현장에서는 성난사자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나중에는 CNN뉴스에 인터뷰한 것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물론 통역의 힘으로 진행되었다.
아쉬운 것은 그분 스타일이 좀 촌스럽다는것인데 인터뷰 당시에도 거의 노숙자 수준의 몰골이라 주변사람들이 한국인 이미지 손상을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CNN 리포터가 왜 그를 선택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맑은 미소와 함께 그의 모습이 전세계로 전파 되었다.
부산대학 후문에서 아랫쪽으로 100미터 정도 내려오면 오른편 상가 2층에 최후통첩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그 곳이 선거캠프가 만들어질 장소였다. 카페주인이 선거출마자여서 영업을 중단하고 캠프 사무실로 사용하기로 정해졌다.
최후통첩은 일반적인 영업보다는 학생들의 연극 무대가 되기도 하고 통기타 공연장으로 연출되기도 한 지역의 문화공간 역할을 톡톡히 하던 명소였다.
그래서 그런지 사무실 곳곳에 무대 소품들이 눈에 띄었다.
같이 일하게 될 동지들과 인사를 나누고 앞으로 일정에 대해 간단한 조율과 각자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주로 홍보/조직/ 본부 정도로 캠프를 편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 역할은 그날저녁 후보자와 만나서 함께 결정하자는 말을 선배에게서 들었다.
부산대 근방에서 유명한 맛집중 하나가 우리터라는 파전집인데 그집 주인이 해병대 출신이라는 소문과 주인아저씨가 과묵해서 몇년을 단골로 다녀도 아저씨와 깊은 대화를 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아마 지금도 여전히 오픈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7시쯤 우리터에서 나와 선배, 후보자 이렇게 셋이 만났다.
후보자는 눈매가 깊고 체격이 좋았고 정장차림이라 그런지 나이가 좀 들어보였다. 그리고 그의 호탕한 웃음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막걸리와 파전을 곁들여 저녁식사겸 잔을 들었다.
세사람 모두가 술을 좋아하는 주당들이라 첫 만남인데도 꽤 오랜시간을 우리터에서 함께 보냈다.
술자리가 마무리되고 근처 커피숖에서 그는 사뭇 진지하고 무거운 색깔로 처음으로 그의 생각과 계획을 펼쳐놓았다.
이어서 그는 나에게 수행을 부탁했다. 후보자와 24 시간을 거의 같이 움직이자는 제안이었고 나는 별 망설임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다음주 주말에 서울에서 공천심사가 있으니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물어왔고 그 자리에서 나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천심사는 형식적 절차이고 제정구선생/ 문익환목사와 그리고 재야인사들과의 교류가 목적이라 설명했다. 어쩌면 김대중선생을 만날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선배가 귀뜸을 해줬다.
이름만 들어도 당대의 거물들이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주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3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