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나의 뜨거운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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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나의 뜨거운 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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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개 1,311 김준

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수록 건강에 대한 염려가 조금씩 커지고 어떻게 살아야 더 오래, 더 건강한 삶을 누릴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져만 갑니다. 요즘같이 하 수상한 시절이야 말할것도 없지만 사실 훨씬 이전부터 건강 염려증이 꽤 심각했었습니다. 동영상을 보다가도 건강관련 정보에는 자동으로 눈이 돌아가고 ‘누가누가 이래저래 아프다더라’라는 소문에 귀가 쫑긋해지곤 했습니다. 때론 아예 몸 상태에 관련된 갖가지 정보를 찾아 인터넷을 누비다가 얼토당토않은 ‘자가진단’을 내리기도 했지요.  


얼마 전, 어느 방송 프로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경험하는 건강상의 문제들 중 대부분이 맵고 뜨거운 국물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뜨끈한 국물은 몇 가지 염류와 지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성분을 함유하지 않기에, 국물의 영양가치는 사실 거의 전무하다며 온갖 국물 애호가들의‘잘못 살아온 반 평생’을 질타하는 내용이었지요. 방송에는 몇 분의 인터뷰도 함께 실렸는데요.. 짬뽕국물이 그렇게 좋을수가 없다던 초로의 등산객도, 설렁탕의 영양소는 끈끈한 국물에 담겨있다고 연신 강조하던 시장골목의 아주머니도, 뜨끈한 국물의 영양부재를 주장하는 의학전문가의 설명을 듣고나서는 모두 머쓱한 표정을 지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생동안 즐겨 온 五樂 (오락 : 다섯가지 즐거움)중의 하나가 그저 혀끝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허깨비였다니요..


그러나 

뜨거운 국물의 가치는 그 안에 녹아있는 화학적 성분에 의해 단정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물질인 국물의 의미는 오히려 물질이 아닌 것들에 의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환절기의 냉냉한 하늘이 찌뿌둥한 아침.. 지난 몇 십년간 수 많은 아침을 맞이해오며 이젠 ‘기상’이라는 절차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포근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아직도 낯설고 억지스럽습니다. 팔, 다리, 등, 어깨.. 사지육신의 모든 근육들이 서로 엉켜 뭉쳐버린것만 같고 밤새 뻣뻣하게 매 말라있던 식도와 위장은 어서 빨리 수분을 공급하라며 아우성입니다.  


질질 발을 끌며 지척지척 걸어가 앉은 식탁위로 아내가 끓여내 온 콩나물 국밥 한 그릇..

뚝배기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맑은 국물에 새우젓 한 젓가락 톡 털어넣은 후, 얼큰한 다대기 잘 헤집어 골고루 풀고서 덜 익은 계란 노른자를 꼭 집어 터뜨려서는 뜨겁고 진한 국물을 농밀한 수증기와 함께 후르륵 넘깁니다. 

밤 새 굳어있던 식도와 위장을 타고 흐르며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오는 열기의 전율을 실감케 하는 한 숟가락의 뜨거운 국물..  메말라 있던 비강을 타고 역류하며 매콤한 수증기의 행복한 알싸함을 선사하는 뜨거운 증기.. 

목울대를 꿀렁이며 타고 넘는 국물의 역동은 싣고가는 영양성분의 유무가 아닌 제 몸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가치가 있습니다. 


식도를 지나며 심장을 덥히고 위장에 다다라 폐부를 윤활하는 더운 국물은, 

근육섬유를 타고서 피부로 번져 나가는 그 따뜻한 온기는, 

하루를 시작하는 삶의 풍요로움이요 물질이 선사하는 물질이 아닌 선물입니다. 

비록 그 안에 담긴 영양이 초라하다 할지라도, 비록 몸을 살찌우는 실용성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국밥의 주인공이 국물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래서 배가 든든하도록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식욕의 원천이 국물인것 또한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활동을 위한 섭식에 대한 응원이고 ‘그렇게 영양소만 따지면 무슨 맛으로 음식을 먹나?’의 ‘맛’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지방과 염분밖에는 함유한 것이 없다 하더라도 국물 없이는 여타 영양소를 섭취할 마음이 들지 않으니 어찌보면 국물이야말로 음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살다보면 가끔씩 ‘실용성’이라는 현실적 손익과는 별로 관계가 없을법한 생활의 요소를 발견하곤 합니다. 비싼 돈을 들여서 장만한 자동차나 모바일폰의 색깔이 그렇고 몇개월을 고생해서 완성한 에세이의 표지 디자인이 그렇습니다. 맛 좋은 음식을 멋까지 좋게 만들어주는 그릇들이 그러하고 제가 지금 쓰고있는 잡문들도 그러한 부류의 하나입니다. 색깔에 따라 성능이 달라지는 전화기나 자동차는 없을 것이고 표지 디자인이 어설프다고 그 내용까지 폄하되는 일도 없을 겁니다. 훌륭한 음식이 평범한 그릇에 담긴다해서 그 풍미를 잃는 일도 없을 것이고 이깟 컬럼 읽지 않는다해서 생활에 지장이 초래되는 일도 전혀 없겠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인간이란 존재는 실효성이 전무한 이런 요소들에 아주 심각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차 색깔이 촌스럽다며 거액을 들여 도색을 하는 분들도 계시고 이미 내용을 완성해 놓고서도 표지디자인 때문에 발을 동동구르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그릇과 세팅이 예쁘면 카메라 플래쉬를 많이 받기 마련이고 읽으나마나 한 소소한 잡문을 통해 배운것이 많다며 기꺼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모두들 염류와 지방말고는 가진것이 없는 국물과도 같이 ‘무의미’한 것들이고, 동시에 식욕을 불러 일으키고 만족감을 선사하는 국물과도 같이‘유의미’한 것들 입니다.   


우리의 아이들도 인간인지라 아주 당연하게 이러한 비실용적인 요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들의 생활습관, 교우관계, 학습태도, 장래희망 등등은 어떠한 타당하고 논리적인 사고와 경험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즉흥적인 언사나 감흥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그래서 감정의 변화에 따라 쉽게 결정을 번복하고 주변의 평가를 의식하다가 큰 일을 그르치기도 하는 것이 10대의 아이들입니다. 바로 옆에 앉혀놓고 있어도 항상 불안하고 친밀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외계종족’이 바로 우리의 아이들인 것이지요. 그렇다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채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우격다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정에 호소하기도 합니다. 


교육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온갖 사례와 이론과 연구결과를 들이밀며 ‘실효성’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하루 온종일 아이들과 붙어 있어야 하는 어머니들은 하루 온종일 전화기에 붙어있는 아이를 향해 지난 실패의 처참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도 합니다. 저 또한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어서 심장 밑바닥에 숯불을 놓은듯한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고, 저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어서 ‘부정적인 예상은 틀린적이 없다’는 불안감을 떨쳐낼 방도가 없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 어른들의 안달복달에 관심을 두지 않는것은 이 모든 불안감의 주인공인 아이들뿐일 겁니다.    

 


왜 그렇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왜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들이 경험하고, 각성하고, 후회하고, 다짐하는 ‘실용적인’ 인생의 길에 대해 한사코 거부감을 보이는 걸까? 도대체 왜 현실적인 삶의 성취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보이는 SNS에, 드라마에, 옷차림에, 게임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정말로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는 지금 당장 가치가 없어보이는 잡다구래한 것들이 인류문명을 끌어가는 주요 요소가 되는 것일까? 과거에 ‘광대’,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인들이 현재에 와서는 인류문화의 중심에 선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돌고 돌아서 결국 ‘국물’에 다다랐습니다. 


아무런 실용적인 영양소를 가지지 못하지만 동시에 모든 실용적인 영양소를 섭취하도록 부추키는 국물..

미지근한 밥 한덩이와 뻑뻑한 고추가루 뭉침을 얼큰하고도 먹음직한 국밥으로 탈바꿈 시키는 진한 콩나물 국물.. 

그렇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인생의 성취와 발전과 번영을 담당하는 ‘건더기’에 관해 역설하고 독려할 때 정작 아이들의 관심은 가슴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국물’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먹어야 에너지가 생기고 콩나물을 먹어야 섬유소가 채워지고 계란을 먹어야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른들의 충고에 대해 ‘그럼 국물은요? 그렇게 먹을거면 차라리 영양제를 먹으면 되지요.. 국물을 빼면 무슨 맛으로 국밥을 먹나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인 것은 아닐까요.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는 반항적인 외침속에는 ‘실용적이지 않은 국물의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호소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국물만으로 배를 채워서는 영양부족으로 쓰러질수 밖에 없겠지만 동시에 국물이 없는 메마른 음식만 꾸역꾸역 먹이다가는 언제 섭식장애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다사다난’ 하다기 보다는 ‘일사다난’ 했던 2021년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달력상의 날짜야 아직 한참 더 남았지만 학생들이 살아나가는 학사일정은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입니다. 인쇄본 발행일을 기준으로 캠브리지 시험은 채 일주일이 남지 않았고 IB 시험은 이주일 남짓, NCEA시험은 일정이 연기되는 바람에 6주 정도의 말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학년말이 다가오면 그동안 이 세상에 연말시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희희낙낙하던 아이들도 슬슬 긴장감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실용성’에 치중된 삶을 살기 시작하지요. 마치 뜨거운 국물 한번 들이켜 마른 식도를 적시고서 본격적으로 밥을 퍼 먹는 시점이 되었다고 할까요? 물론 국물과 건더기에 분배된 시간의 균형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붙습니다만 한사코 국물만 들이키지는 않는다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그저 얼마남지 않는 시간동안 열심히 퍼 먹어서 국물이 선사하는 심적포만감과 건더기가 선사하는 실용적인 영양섭취가 적절한 균형을 이룰수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도 옆에 앉아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는 제 아이를 옆눈으로 슬쩍 살펴봅니다. 엄마와 아빠가 옆에 있어야 딴짓 안하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며 아예 식탁을 책상으로 쓰면서 새벽까지 엄마 아빠를 붙들어 놓고 있는 아이입니다. 세상 어느 부모나 다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공부하며 노력하는 자식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는듯 합니다. 저의 인생에 실용적인 도움이라고는 하등 끼쳐본적이 없는 아이이건만.. 마치 한 숟가락 삼키고나면 얼었던 속이 화악 풀리고 긴장되었던 근육이 녹진하게 이완되는, 그런 뜨겁고 아름다운 국물과도 같이 사랑스러우니... 아마 이 아이도 그 존재자체로 마음을 만족시키고 옆에 있어줌으로써 실용적인 삶을 가능케하는 제 인생의 ‘뜨거운 국물’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가격리의 어려움 속에서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노심초사하시는 모든 학부모님들..


실용적인 도움은 하나도 없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삶을 덮혀주는 ‘따끈한 국물’들에게, 함께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나의 자식으로 살아주어서 고맙다고 인사 한번 건네시면 어떨까요. 아마도 미지근했던 그 아이들도 다시 한번 펄펄 끓고싶어지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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