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을 좋아한다. 이 사실 때문에 들은 수많은 지탄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입이 아플 정도로.
부드럽고 보송보송한 동물 인형에서부터 바비까지 모두 좋아한다. 피에로 인형이나 고딕 풍, 또는 동양 전통 풍에 가까운 인형들은 약간 소름이 끼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다 좋아하는 편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인형을 보면 무척 편안한 마음이 든다. 가정적이고, 그야말로 ‘집’이라는 느낌. 인형을 둘 곳은 집 밖에 없어서 그런 걸까.
어렸을 때까지는 솜인형을 많이 모았고, 그 모든 동물 인형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곤 했다. 모두 이름이 있었고, 그 많은 인형들에게 괴어줄 베개가 없어 내 두 팔을 내어주었다. 그렇다 보니 항상 양 팔을 옆으로 쭉 벌리고 옆으로도, 모로도 눕지 못해 항상 빳빳하게 잠들었었다. 물론 일어나보면 베개며 인형은 모두 사방에 널려 있었고, 가끔 어떤 운 없는 녀석은 벽과 침대 사이에 끼어들어가곤 했지만 그 밤들을 꽤 기분 좋게 기억한다.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했던 나를 안심시켜주곤 했던 인형들을.
물론 나이가 들면서 혼자 쓰는 침대의 편안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인형을 가지고도 노는 날들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곰돌이들과 바비 인형들은 하나 둘씩 주변의 아이들에게 넘어갔지만, 그래도 아이의 유년기에서 인형이 차지하는 비중은 제법 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번 인형을 좋아하게 된 사람은 결코 그 일방적인 애정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도.
어른이 된 지금의 나도 여전히 인형과 함께 잠들고 있다. 다만 인형이라고만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는 것이, 베개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크고 푹신푹신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깨어 보면 인형 겸 베개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게 당연한 풍경이긴 하다). 그리고 바비 인형 대신 구체관절인형을 소유하고 있다. 70cm의, 커다랗고 진짜 사람 같이 생긴 인형이다. 마음 같아선 이것도 바비처럼 모으고 싶지만, 바비 인형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가격에 얌전히 포기하고 대신 인형에게 입혀줄 옷을 대신 산다.
그러니까, 인형은 어린 내게 있어선 안심의 근원이었고 지금에 있어선 욕망의 대리만족 대상인 셈이다. 인형을 사용하는 목적의 변천사란 참 기묘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끼는 것은 매한가지면서도. 아니, 오히려 더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구체관절인형은 훨씬 비싸고 관리법이 까다로우므로.
지금도 유독 생각나는 인형이 하나 있다. 토끼 인형이었고, 아홉 살 때 첫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빠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학교를 제외하고 그 인형을 항상 갖고 다녔었다. 엄마의 친구 집에 놀러 가게 되었을 때도 난 아무 생각 없이 그 인형을 들고 갔고, 거기서 그 집의 막내딸에게 꼼짝없이 그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른 큰 아이들과 노는 사이 막내가 그걸 ‘찜’한 것이다.
집에 갈 때가 되어서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아기가 뭘 이해하겠는가. 그저 이건 이제 자기 것이라고 떼를 쓸 뿐이었다. 고집이라면 나도 한 고집하지만, 엄마의 성마른 종용과 아줌마의 부탁에 결국 그 인형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울며불며 했던 것도, 뚜렷이 기억한다. 오죽 한(?)이 맺혔으면 지금도 그 순간 순간을 필름 촬영된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하며 이를 갈까. 내 것에 집착이 심한 성격이니 만큼 더더욱.
자초지종을 들은 아빠가 그 다음 크리스마스에 똑 같은 토끼 인형을 선물로 사주었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선 다른 것이지, 같은 인형이 아니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아끼긴 했어도.
이렇듯, 인형이 내게 뜻하는 바는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건 역시 - 상기했듯 - ‘익숙함’의 느낌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