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을 좋아한다. 옷을 사거나 책을 사는 등의, 좋아하는 물건들을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일상 생활에 필요한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사러 가는 일도 모두 즐겁다.
단순히 돈을 쓰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부정하진 못하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소비 자체에는 뭔가 근본적으로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갈 능력이 있고 능력이 있어 살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물건 사는 것을 사랑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사실 그때는 뭔가 새롭고 신기하고 맛있는 것들이 눈 앞에 주르륵 늘어져 있으니 순수하게 갖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보다도 훨씬 오래 전에 나는 시장 아기였다고 부모님이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장난스럽게 말해주셨던 것도 있으니. 늘 뭐든 직접 만져보고, 먹어보고(?) 가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조금 커서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생긴 후에는 편집증적으로 일부를 아껴두는 한편, 스스로 ‘써도 좋다’고 선을 그은 한도까지는 정말 맘껏 돈을 썼다. 책에, 옷에, CD에, 군것질에. 그럴 때의 소비는 나의 성장 여부를, 내가 어른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또 재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 긍정에 다름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밖에 자기 확인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여기고 싶다.
한국에 와서는 돈을 쓰는 빈도며 액수의 씀씀이도 훨씬 늘었다. 일을 하고, 돈을 벌게 되었으니 자신에게 투자하거나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니까. 무엇보다도 돈을 대가로 받는 모든 일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도 스스로를 지출 기입장의 둘레 안에 안전하게 가둬놓고 특정 액수만을 사용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견딜 수 없어진다는 이유가 있어서다.
현재 가장 많은 씀씀이를 차지하는 부분은 식료품이며 생필품일 것이다. 없이 살 수 없는 물건 몇 가지가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새로 사오지 않으면 다 떨어지고 만다. 가령 우유 - 이건 유통기한이 있어서 더 까다롭다 - 라던가 시리얼 - 아침 대용으로 먹기 때문에 없으면 굶어야 한다 - 같은. 가끔 세제나 샴푸처럼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가정적인 물건들이 끼어들기도 한다.
이런 탓에 요즘 회사 다음으로 많이 가는 장소는 동네 슈퍼마켓이기도 하다. 슈퍼마켓은 아주 매혹적이다. 빨래용 가루비누를 선두로 온갖 냄새가 떠다니고, 사시사철 항상 서늘한 온도를 유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이 즐겁다. 화려한 색채에서부터 전단지, 광고지까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류의 것이다. 정돈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혼돈은 나를 기쁘게 한다.
그곳에 가면 이제부터 돈을 쓴다는 생각에 몸이 떨리고, 무엇을 사야 할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점검한다. 보통 필요한 것이 생기면 그때그때 기록해두는 버릇이 있어서, 뭔가를 살 때도 그렇게 적어놓은 쇼핑 리스트를 보며 체크하는 편이다. 아주 가끔은 용돈이 남아서 충동적으로 먹고 싶은 것을 살 때도 있고, 그럴 때가 가장 즐겁지만, 이렇게 계획적인 구매도 나쁘지는 않다.
물론 내가 가장 자주 사는 우유나 시리얼들은 대개 무겁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물건들인데다가, 슈퍼마켓들은 더 이상 봉투를 공짜로 주지 않아 종종 일일이 들고 와야 하지만 (가방을 거의 항상 까먹는다) 그래도 뿌듯함과 즐거움에 별 악감정 없이 모두 끌어안고 온다.
언젠가 완전히 어른이 되면 쇼핑도 더 이상 즐겁지 않을 날이 올 테지만, 그 전까진 난 즐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