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은 학문과 재주, 덕행과 범절을 모두 갖춘 이였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이웃집 재상의 아들과 친하게 지냈는데 재상의 아들이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아 생명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아들의 병 때문에 근심하던 재상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을 잘 알아맞힌다는 점쟁이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점쟁이를 불러와 점을 치게 하였다.
점쟁이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재상의 아들이 모월 모일 모시에 세상을 뜨겠다고 하였다. 재상이 눈물을 흘리며 살릴 방법을 묻자 그는 자신이 죽게 되므로 차마 말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재상이 간절히 물어도 말을 하지 않자 재상의 며느리가 칼을 들고 뛰쳐나와서는 점쟁이의 목을 조르며 자신은 병자의 안사람인데 낭군이 죽으면 자기도 죽을 것이며 점괘를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이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죽기는 매 한가지일 것이니 말하라고 소리쳤다. 점쟁이는 한참 동안 묵묵히 있더니 한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도 붙잡을 수 없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며 말할 테니 목을 놓아 달라 하였다. 그리고는 이항복이란 도령을 모셔와 병자와 함께 있게 하되 잠시도 떨어져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부디 자신의 처와 자식들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항복은 그날 바로 재상의 집에 초대되어 재상의 아들 곁에 꼭 붙어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삼경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문틈으로 들어오더니 촛불이 깜박거렸다. 재상의 아들은 정신을 잃었고 촛불에 귀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칼을 짚고 선 귀신은 이항복에게 병자를 내놓으라고 외쳤다. 귀신은 병자와 전생의 원한이 있어 원수를 갚아야 하고 지금이 기회라고 말했다. 이항복이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친구를 넘겨줄 수 없다고 하자 귀신은 크게 성을 내며 칼을 겨누고서 그에게 달려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물러났다. 달려들었다가 물러나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귀신은 마침내 칼을 던지고 엎드렸다. 귀신은 이항복에게 도련님은 이 나라의 기둥으로 명성이 역사에 길이 남을 분이라 감히 해칠 수 없으니 자신을 가엾이 여겨 병자를 넘겨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이항복은 자신을 죽이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라며 다시 병자를 안고 누웠다.
시간이 흘러 먼 데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귀신은 원통해 하며 울었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분명 그 점쟁이 놈이 일러 준 것일 터이니 그놈에게 분풀이를 해야겠다며 사라졌다. 귀신이 사라진 후 재상의 아들은 입에 따뜻한 물을 조금씩 부어 주니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다음날 점쟁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재상은 점쟁이의 집에 장례비용을 넉넉하게 보내고 이후 그 처와 자식들도 잘 돌보아 주었다. - 계서야담(溪西野談)
송영림: 소설가, 희곡작가, 아동문학가
■ 자료제공: 인간과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