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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완전정복 (2)
이태리 베네치아를 여행하다가 터미널에서 마셨던 에스프레소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버스기사가 장담하는 최고의 커피라는 말을 그땐 믿지 않았지만 그 이후론 한 번도 그런 감동적인 에스프레소를 만날 수가 없었다. 와인도 레스토랑에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으로 마켓에서 같은 와인을 사면 그때 그 맛이 아니다. 커피가 변한 것일까 와인이 변한 것일까? 그러고 보면 혀로 느끼는 것이 맛의 전부는 아니다. 에스프레소가 감동적이었다기 보다는 여행이 행복했던 것이고 와인이 훌륭했다기 보다는 좋은 사람과 함께한 그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던 것이다.
와인은 어떤 요리나 음식과도 어울린다. 다만 선택한 음식과 조화가 잘 되는 와인을 곁들인다면 더욱 음식의 맛을 상승시킬 수가 있다. 그것이 마리아주(Marriage)이며 서로 간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맛과 향을 최상으로 돋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 육류에는 레드 와인을, 생선이나 야채가 들어간 음식은 화이트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한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비법은 음식과 와인의 색과 향기 그리고 맛의 무게(Weight)를 맞추어 주는 것이다.
와인과 음식의 궁합에서 소스에 따라 그리고 음식의 색상에 따라 와인을 선택해보기를 권한다. 예를 들어, 닭고기처럼 흰살 고기는 화이트 와인, 연어처럼 붉은 살 고기는 가벼운 레드 와인, 달콤한 음식은 달콤한 와인, 강한 소스의 음식에는 풀 바디(Full Body)와인, 가벼운 음식에는 가벼운 와인(Light Body)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와인과 음식의 매칭은 다양한 와인종류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정해진 규칙은 없지만 몇가지의 팁은 있다. 와인의 무게감, 맛, 그리고 질감을 보고 음식과 관련시키는 방법이다. 만약 음식의 맛이 와인보다 강하다면 와인이 밋밋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아주 단 케이크에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을 마신다면 와인이 더욱 더 드라이(Dry)하게 느껴질 테니, 케이크만큼 달달한 스위트(Sweet)와인을 선택해야 할 것이고, 양념이 많고 향이 강한 고기음식에 부드러운 피노누아보다는 카베르네 소비뇽처럼 구조가 단단하고 타닌이 강한 레드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사용된 소스나 양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할 수 있는데, 흰살 생선요리에 붉은 색 소스가 가미되었다면 화이트 와인보다는 가벼운 레드와인이 잘 어울릴 가능성이 높다.
음식의 온도에 따라서도 와인선택을 다르게 해보자. 생선이든 육류 든 차갑게 서빙 되었다면 화이트 와인을 선택하고, 데운 생선요리나 뜨거운 소스를 가미한 해물의 경우에는 화이트 와인보다는 가벼운 레드 와인을 선택하듯이 말이다. 따뜻한 육류에는 풀 바디(Full Body)의 레드 와인이 어울리는 데 비해서, 구운 닭고기나 오리와 같은 가금류는 오히려 차가운 로제와인이나 오래 숙성하지 않은 가벼운 레드와인이 잘 어울린다.
맛(味)을 볼 때 혀는 신맛, 단맛, 쓴맛, 짠맛, 알코올을 감지한다. 와인을 마실 때 함께 입안으로 들어온 공기는 향을 코 위쪽으로 보내 풍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질감과 감촉, 산도의 생기발랄함, 과일 맛의 원숙도, 알코올의 무게 감과 뜨겁게 느껴지는 정도, 타닌의 드라이한 정도를 분석하는 것 또한 맛(Tasting)의 영역이다. 가격이 저렴해도 균형이 잘 잡혀 있고 와인을 삼킨 후에도 풍미가 입 안에서 기분 좋게 지속된다면 품질이 좋은 와인이다.
‘밋밋하다’, ‘신선하다’는 맛은 산도이며 ‘달다’는 느낌은 와인의 잔여당분이나 알코올에서 오는 풍미다. 쓰다고 느끼는 것은 단지 타닌 때문만은 아니다. 높은 알코올도 쓴맛을 느끼게 한다. 엄밀히 말해서 쓴맛은 미감이며 타닌은 촉감에서 오는 느낌이다. ‘거칠다’, ‘무겁다’와 같은 촉감이나 질감은 ‘맛’이 아니지만 와인의 균형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와인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이 와인의 풍미와 향은 알코올의 등을 타고 넘실거리며 단맛과 신맛, 쓴맛 외에도 촉감을 전달하고 그 뒷맛을 만들어 준다.
결국 와인을 시음할 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느낌들 사이의 조화(Balance)에 유의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가 지나치면 좋지 않다. 좋은 와인은 삼킬 때 아무런 자극이 없어야 하고 목구멍의 옆면을 부드럽게 스치고 내려가며 풍부하고 다양한 향기(Aroma)를 여운으로 남긴다. 그래서 아로마를 인지할 수 있는 시간, 여운(Finish)을 길게 하기 위한 와인 메이커들의 블렌딩(Blending)작업은 단순히 맛과 향을 혼합하는 과정은 아니다. 블렌딩을 거치면 각각의 포도 품종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향이 상호작용을 일으켜서 새로운 향을 탄생시키고 볼륨 감이 깊어져서 맛과 개성이 강해진다. 결국 블렌딩은 와인을 ‘자연의 영역’ 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어떤 음식과 어떤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법칙은 보편적인 원리를 제시할 수는 있지만 사실 정해진 것은 없다. 그러니 마리아주는 매우 주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보다도, 음식과 와인을 함께하는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배려가 필요하다. 내가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치 있고 슬기로운 음주(飮酒)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