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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발걸음이 달라지는 것은 마음자세 때문일까요?
편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으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볍습니다. 차도를 따라 10분쯤 걸으면 운동장 입구가 약간의 경사로 되어 있어요. 그 별 것 아닌 언덕바지를 오르는데 벌써 숨이 턱에 걸리고 다리가 끌립니다. 느림보 걸음으로 주춤거릴때 앞을 가로막는 나무 한그루.
겨울 나무답게 잎을 다 떨궜습니다. 까칠하게 메마른 이끼옷을 두르고 초라해서 가엾어 보입니다. 눈을 들어 모처럼 위를 쳐다보니 노르스름한 열매가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더군요. 그 나무도 한 때는 싱싱한 잎이 자라고 꽃도 피우면서 멋을 부렸을 것입니다. 그 나무와 마주칠 때마다 왠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외면하고 싶어졌습니다.
몇걸음 뒤에 서 있는 위풍당당한 나무가 나를 보라는 듯, 손짓해 부릅니다. 아마도 그 나무가 없었다면 나는 걷기를 포기하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몸집도 튼실한 검은 나무가지에 초록의 이파리들이 무수히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숱이 많은 머리채처럼 촘촘히 박힌 잎새 사이사이로 자즈러지게 빨간 열매가 꽃처럼 예뻤습니다. 이 삭막한 겨울에 정말 조화로운 아름다움 이었습니다.
고목에도 꽃이 핀다더니... 희망을 주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 풀렸던 다리에 힘이 생겨 힘차게 걷던 길을 다시 걷게 됩니다. 특별히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묵묵히 제 책임에 충실한 저 나무. 퇴물이 되어가는 내게 새로운 욕구의 메세지를 주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같은 계절을 저마다의 특징으로 살아내는 자연의 신비가 참으로 놀라웠어요.
거역할 수 없는 순리를 묵묵히 받아드리는 삶. 그들 앞에서 새삼스럽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튼튼하게 철책으로 둘러쳐진 넓은 운동장. 잠궈진 철제 고리를 벗기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순간부터 내 늙음은 어디론가 숨어버는 것 같아요. 불현듯 활기가 솟아나는 느낌이 듭니다.
제비처럼 날렵하게 달리고 움직이는 청춘들의 숨가뿜이 처져있던 후줄근한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기 때문입니다.
맨살을 드러낸 그들 앞에 바람 한 점 들어갈 틈없는 단단한 무장에 은연 중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남을 의식하지 않는 여기 사람들이니까,라고 자위를 합니다.
트랙안의 푸른잔디 마당에선 학생들의 럭비시합이 한창이군요. 푸른색 붉은색 헝겊이 하의곁에 펄럭이는게 편 가르기 인가봅니다. 이리뛰고 저리 몰리고 그들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땀이 튀는 것 같습니다.
붉은 바닥에 하얀 선이 산뜻한 여섯개의 트랙, 안쪽 선 다섯개는 젊은이들에게 양보하고 맨 가장자리 줄에서 시작을 합니다.
청춘 바이러스가 바람결에 날아와 감염이 되었을까요? 발걸음이 아주 가볍습니다. 몸은 허약해도 걷는 것 하나만은 자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하면서 조심스럽게 걷습니다.
“할머니, 걸음걸이가 이상해요. 왜 그러세요?”
술취한 사람처럼 발이 놓이는 내 발걸음을 어느 날 손자한테 들켰던 생각이 나는군요. 애써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내 맘대로 조정이 안되니 어쩔 수가 없지요. 힘이들고 체력이 달리면 눈에 띠게 심해지니 방법이 없습니다. 수년 전부터 한쪽귀에 이명(耳鳴)이 생겨 괴로웠습니다. 얼마후엔 귀가 아예 닫혀버리고 말더군요. 그 때부터 몸에 중심잡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늙는다는게 이런거였구나. 수순을 밟듯 하나씩 잃어 가는 것, 처음엔 많이 서글펐습니다.
안되는 것은 빨리 체념하는게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긍정할 때까지 많이 힘들었습니다. 불편함을 참아내는 일 말고도 상실의 심적고통이 더 컸습니다.
“왜 그렇게 못 들으세요?”
“이 쪽으로 오세요 그 쪽은 아닌줄 아시면서...”
이젠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부끄러워할 나이가 아니라네요. 당연한 배짱으로 잘도 버텨냅니다.
자주 부딪히는 60대쯤의 아랍계 남자가 오늘도 여전하군요. 아담한 키에 상의를 벗어 허리에 두르고 반팔 티 차림으로 열심입니다. 걷는건지 뛰는건지 발을 낮게 끌고가는 모습을 보면 이쪽이 안쓰러워집니다. 왼쪽팔은 옆구리에 딱 붙이고 오른손 한손만 힘차게 휘두릅니다. 저 앞에 누군가를 반기는 모습같아서 늘 웃음이 나오곤 하지요. 몸이 정상이 아닌것 같지만 얼마나 오래 견디는지 그의 얼굴은 늘상 땀으로 번들거리고 등뒤가 축축하게 젖어 있습니다. 대단한 체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라 부럽습니다. 자주 만나다보니 그와는 이제 눈인사도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50대의 중국인 남자는 허우대가 아주 좋아요. 그 나이면 다른 사람들은 뛰는데 그는 잰걸음으로 걷기만을 고집합니다. 손에는 핸드폰을 쥐고 연신 들여다보면서도 걸음은 무척 빠릅니다. 저만치 뒤에 오다가도 어느새 바람처럼 스쳐서 앞을 지나가면 괜스레 밉살스러워 지지요.
긴 다리로 보폭도 뒤떨어지지 않을텐데 왜 뒤쳐지지? 주제넘은 오기가 그의 등뒤에서 스멀스멀 솟구쳐 오릅니다. 그 사람이 무슨죄가 있다고... 젊은이의 당당한 체력을 감히 넘겨다보다니 가소롭지요. 공연한 심통을 부리면서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발길은 무딘데 마음만 바뻐서 균형 못잡는 상체가 자꾸만 먼저 나섭니다.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빳빳이 세워보지만 어느새 다시 그런 자세가 되어 있음을 알게됩니다. 자주 시달리는 허릿병 때문에 생긴 습관이란걸 알기에 깜짝 놀랩니다. 그 상태 그대로 노력안하면 아마도 꼬부랑 할머니가 되겠지요. 정신을 가다듬고 꼿꼿한 자세를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하이힐을 신은 엄지 발가락에 힘을모으고 멋지게 걸었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이젠 반대로 뒤꿈치를 먼저 땅에 닿도록 걸어야 한답니다. 마음은 아직도 옛날처럼 고집하고 싶은데...
시선을 멀리 고정하고 팔을 많이 흔들어야 힘이 덜 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가족들과 산책삼아 휘적휘적 조금 걷다가 나가는 노인들은 가끔 보았습니다. 제대로 트랙을 밟는 나같은 운동 선수(?)는 한 사람도 본적이 없다는데 그나마 위로를 받습니다.
젊은이들만의 세계에 뛰어든 주책없는(?)이방인 이었을까요? 그것도 얼굴 밋밋한 동양 할머니가...
세바퀴 돌면 벌써 다리가 무거워집니다. 한번 더, 한번 더, 욕심을 부려 다섯바퀴로 마무리를 합니다. 골프채를 휘두르던 불과 일년 전 일이 먼 과거로 아득하기만 합니다. 노후의 세월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고 추억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허겁지겁 철책문을 밀고 나오면 벤치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누구 눈치 볼 것 없이 길게 누워 수고한 몸을 달래줍니다.
잠시 눈을 감으니 고요로운 평안에 나른해집니다. 무념무상, 유체이탈의 상태가 바로 이런 걸까요?
혼자만의 우주를 경험하는 짧은 명상의 시간입니다.
낮은 하늘엔 뭉게구름이 저녁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어요. 누워서 보는 높은 하늘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파랗게 빛났습니다.
문득 저 한점 티없이 드넓은 하늘을 화판위에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여생 아름다운 꽃을 그리고 싶군요. 거기 나만의 독특한 향기까지 곁드릴수 있으면 얼마나 멋질까요?
얼룩지고 무늬복잡한 한 세상 잘도 견뎌 왔습니다. 이제 허욕도 그 무엇도 훌훌히 다 벗어던지고 자유로움만 남았습니다.
세속의 혼탁했던 영혼을 저 샘물처럼 맑은 파랑으로 깨끗이 씻어내고 싶습니다.
화사하고 밝게 투명해진 영혼으로 고운 무지개 속을 끝까지 걸어가고 싶습니다.
이젠 나를 닮아 미워했던 겨울나무, 나목(裸木)을 더 많이 사랑하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