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코로나 사태 이전 이야기다. 문학 관련 행사가 있어서 사전 답사차 안상학 시인과 강화도엘 갔다. 강화도 토호 함민복 시인의 안내와 지시를 따를 참이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인삼센터가 있고 거기에서 함민복 시인의 부인이 인삼가게를 한다. 부인께 인사를 드리고 생글생글 잘 웃는 허름한 차림의 함민복 시인을 인수받아(ㅎ) 나왔다. 시인의 배낭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 있었다. 강화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안상학 시인이 말했다. “태어날 때의 별의 운행은 물론 지구의 날씨, 태어난 시간, 태어난 곳의 풍토, 사회적 분위기, 가족들의 심리 상태 등이 모두 사주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김주대는 태어난 때를 살펴보면 봄도 여름도 아닌 시기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끊임없이 방황하며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인지도 모른다. 여자는 늘 있다.”
아, 좀 안 좋다. 여자가 늘 있다는 데서 다만 위안을 얻었다. 안상학 시인은 시인으로서도 훌륭하지만 껴, 껴 하는 안동 특유의 말투 속에 촌사람의 의리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뼈대도 굵고 키도 큰 시인이다.
고려시대 문인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의 묘소에 가서 신발 벗고 큰절을 올렸다. 키가 크지 않은 함민복 시인이 말했다. “이규보 선생이 그런 말을 했어. 여자는 양심을 찍어내는 도끼라고.”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양심이고 뭐고 다 해체돼 버린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무척 좋은 내용이었다. 늘 양심을 해체하고 싶었던 나는 솔깃했다. 함민복 시인은 소박하고 섬세한 체험에서 나오는 아주 재밌는 얘기들을 낮은 목소리로 느리게 잘했다.
“아, 강화도 여기 하림치킨 공장이 있어. 친구가 개를 키우는데 개 주려고 닭대가리를 하림치킨 공장에서 얻어 와서 대형 믹서기에 물을 넣고 돌려. 그러면 갈려서 물이 되는데 닭의 눈알은 갈리지 않고 물 위에 전부 동동 떠. 눈알들 수백 개가 물 위에 떠. 눈알의 탄력 때문인지, 말랑거림 때문인지 믹서기 칼날이 먹히지 않아. 부드러운 걸 칼이 못 이겨.”
키 작은 내가 대꾸를 했다.
“사람들을 대형 믹서기에 넣고 갈면 뼈도 근육도 다 갈리겠지만 혀들은 안 갈려 둥둥 뜨겠네요. 말은 칼보다 세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입을 벌려 혀를 단단하게 말고 공기를 크게 토하며 웃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전등사에 가서 오규원 선생의 소나무와 전 민예총 이사장 김용태 선생의 느티나무를 보았다. 몸은 떠났지만 영혼은 어쩌면 남아 영원히 푸르게 자라고 있는 수목장들이었다. 작은 항구의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술 끊은 지 4년째라는 함민복 시인은 물만 마셨지만 어울려 주려고 그랬는지 물에도 취하는 듯이 보였다.
술값 커피값 밥값. 돈은 언제나 서로 내려고 ‘내가 낼게, 내가 낼게’하며 막 다투어 계산대 앞으로 달려나갔다. 안상학 시인이 말했다.
“우린 셋 다 쇤네 근성이 있어.”
쇤네 근성은 소인네 근성, 혹은 머슴 근성을 말한다. 노예 근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근성을 가진 사람은 웬만해서 상대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하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 다만 천한 비유이지만 한 번 화를 내면 식칼과 도끼를 든다. 쇤네 근성을 가진 우리들이 어찌하여 그토록 서로에게 친절하고 잘 어울렸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지난날을 생각하면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코로나 사태가 어서 종식돼 사람 사이의 정과 대화가 무람없이 이어지는 시절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함민복 시인, 안상학 시인 부디 건강하게 살아내어서 다시 만나자.
출처- 서울신문 칼럼 ‘김주대의 방방곡곡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