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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아닌 오늘만같은 일상을...

0 개 1,395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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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 달랑 한장으로 남은 달력을 내리고 새 것을 바꿔 걸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무심한 세월이 야속했지만, 붙들어도 잡을 수도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제 나이도 나이지만, 코로나의 알 수 없는 횡포에 새로운 꿈조차 마음대로 가져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저 덤덤한 기분이었다.


여기저기서 새해 복 받으라는 덕담이 야단스럽게 울려댄다. 어떤 복을 어찌 받을 것인가? 생경스러웠다.


그저 딱 한가지 간절한건 오늘같은 일상이 바뀌지 않았으면... 외부적으로는 코로나,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지키고 싶은 바램이었다.


잡아둘 수 없는거라면 빨리 보내 버리자고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꼭감고 잠을 청했지만 평소처럼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이 더 똘똘해 지면서 눈앞에 생생한 그림들이 어른거렸다.  


요란스러운 전화 벨 소리에 소스라쳐 단잠이 깨인 어느 그믐밤이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댕그렁... 댕그렁.” 길게 여운을 끌며 귀청을 때리는 종소리.


아! 내 조국 대한민국의 새해를 맞이하는 ‘보신각’의 타종 소리구나, 귀에 익은 반가운 소리였다.


해를 거르지 않고 고국의 새 아침을 일깨워주던 친구,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와 함성들을 들으며 까만 밤을 흥분으로 지새우곤 했었다.


모든게 전 같지 않은 지금, 그 때처럼 보신각 종소리가 간절하게 듣고 싶었다. 종소리에 섞여 들려오던 동포들의 희망찬 함성도 듣고 싶었다. 타국에서 사는 나를 알뜰히도 끌어안던 친구도 너무 보고싶은 밤이었다.


딸들을 시집 보낸지가 엊그제 같은데 그 딸들의 딸이 벌써 시집을 가서 이제 증조 할머니 될 날이 코앞이란다. 반가움 뒤에 씁쓸한 여운이 느껴졌다. 가는 세월의 허무함이 무심결에 드러나는 증조 할머니의 솔직한 심정을 우리는 공감했다.


늘상 소녀처럼 꿈이 많던 여인이었다. 책도 많이 읽고 세계 오지를 여행하면서 경험한 것이 많은 깨인 할머니였다. 이제 팔십이란 세월에 불타던 열정은 싸늘하게 식고 재만 남은 인생길이다. 조용히 무릎꿇고 내리막 비탈길을 묵묵히 견디며 살아간다.


백화점 지하에 아이스크림 코너에서였다. 화려한 몸치장에 저마다 명품백을 들은 초로의 여인들이 모여있다. 수다판이 한창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잠깐 훔쳐 들어보니 목소리를 높이는 수다가 전부 돈자랑 자식 자랑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우린 속물로 늙지말자고 다짐하듯 말했다. 혹시 그들만큼 가지지 못한 자위의 말은 아니었을까? 서로의 마음을 잘 알기에 마주보며 웃음을 흘렸었다.


그 후, 20여년을 우리는 떨어져 살았다. 여기까지 와서 생각해보니 어찌 사는게 속물이 아닌건지 판단이 어렵다. 한번뿐인 인생 허투루 살지 말자고 노력은 했지만 잘 모르겠다.


맘이 통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면 스트레스 날리는 수다를 왜 안 떨었으랴, 그렇더라도 내겐 일이 있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글쓰는 일. 얼마나 다행스럽고 축복받은 일인가. 그 다행스러움을 소명으로 알고 게을리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녹슬어가는 머리를 세뇌하듯 컴퓨터 앞에 앉아 끄적였다. 손으로 쓰기에 불편함을 컴퓨터가 대신해주니 고맙기만 했다.


오늘 뒤돌아보며 최선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지금의 내 삶 전부였기 때문이다.


“따다다닥 퓨웅...” 갑자기 밖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벌써 자정이 되었구나. 새해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었다. 


스카이 시티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순간 가슴이 울렁거려왔다.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 뉴질랜드에 와서 두번째 맞는 해가 새 천년의 밀레니엄이었다. 2000년 21세기의 첫 아침이 열리는 특별한 날 이었다.


마지막 날, 해가 저물자 마을 리더격인 ‘로드’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집 앞으로 너른 공원이 보이는 툭 터진 어느 집이었다.


어른 아이들 수 십명이 모여서 잔치집 같은 분위기였다. 남자들은 둘러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며 애들처럼 소리치고 즐거워했다.


여인들은 따로 모여앉아 차를 마시며 소곤소곤 이야기 꽃을 피웠다.


모기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둘러앉은 마치 우리나라 시골동네 여름밤 풍경같았다. 상큼하게 깎은 마당에서 풋풋한 풀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콘크리트 아파트에 익숙한 내게 아직은 낯설은 냄새였다.


검푸른 하늘에서 별빛이 반짝이며 찬란하게 쏟아져 내렸다. 담장 곁 멋없이 키 큰 나무에는 하얀 쟈스민 꽃을 장식한듯 눈이 부셨다.


밤은 점점 깊어갔다. 거실에서 떠들고 놀던 아이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조용해졌다.



한 여름이었지만 밤바람은 몹씨 싸늘했다. 와인의 열기로도 안되는지 누군가 창고에서 나무를 날라오고 화덕에 불을 붙였다.


자정이 가까워오자 갑자기 조용해져서 긴장했다. 모두가 잔을 다시 채워 높이 들었다.


“쓰리... 투... 원...”


와....... 함성이 터졌다. 저마다 잔을 부딪치며 ‘해피 뉴 이얼...’을 외쳐댔다. 흥분의 도가니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춤을 추며 미친듯이 방 안을 맴돌며 떠들어댔다. 그들의 삶이 그지없이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지구상에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뉴질랜드에서의 21세기 첫 새벽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게 그런 감동도 있었다는게 신기하기만 했다. 내 인생에서 지워지지않는 특별하게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서툰 나를 이 나라에 정붙이고 살게한 따사롭고 사람냄새 구수한 이웃, 시골스런 정서가 너무나도 좋았던 20년 전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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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신축년 첫 날이 밝아왔다. 담담했던 어제와는 달랐다. 갑자기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환희가 밀물처럼 밀려와 가슴을 흔들었다.


바쁘게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열어보니 상큼한 바람이 쏴... 하고 얼굴에 와 닿는다.


아...! 나는 오늘도 건강하다. 계절도 여름이라서 더 좋았다. 오감도 변함없이 건재하다. 맑은 하늘에 부지런한 태양빛이 벌써 창가에 와 있었다. 내 게으름을 일깨우듯이...


매일 똑같은 일상을 지루하다고 투정했던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그 변동없는 평범한 일상을 언제까지 누릴수 있을지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건강해서 뜰을 만지던 캔 할아버지가 어제 병원으로 실려가는 걸 보지 않았던가. 매일 아침마다 먹거리를 사러 마트에 가던 그 소박한 일상을 지키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 저 타오르는 태양빛을 외면한채 병마와 싸우며 생존의 위기를 넘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매일 매 시간의 변화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만이 축복받고 행복한 시간이다.


얼마 남지않은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기도 하다.


서둘러 욕실로 뛰어들어가 샤워를 했다. 한 점 티없이 깔끔하게 새 날과 마주하고 싶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문을 하면서 외출할 때 처럼 정성으로 화장도 했다.


특별한 걸 바라는건 과욕이었다. 스스로를 귀중히 보듬고, 사랑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빨래들이 허수아비의 춤같아 웃음이 나왔다. 깔깔 큰소리로 웃어본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바로 이거야... 


굳어진 근육을 함빡 웃음으로 인증사진도 찍어 놓는다. 첫 마음으로 변함없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생한 증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빌어본다.


신축년, 소를 닮은 무게로 경박하지않게 하소서. 메마른 가슴에 촉촉히 비내려 적셔주시고, 소박한 일상을 행복으로 살게 하소서.


해질녘 어스름에 하얗게 어여쁜 박꽃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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