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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의 주인공은 ‘훌륭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란 결함이 없는 인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을 의미한다. 가령, 노예나 평민 보다는 (오이디푸스 같은) 왕은 죽어야 비극의 규모와 강도가 커지고, 관객들에게 ‘공포와 연민’이라는 비극적 감정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원칙은 잘 지켜져서 먼 고대서부터 세익스피어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의 주인공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귀족들이었다.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문학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이 일이었다. 영국에서 소설이라는 근대 시민 중심의 새로운 장르가 출현한 것도 18세기이다. 소설이라는 근대 시민문학이 부상하면서 영웅 중심의 서사시 시대는 끝났다. 따지고 보면, 문학 뿐만이 아니라 역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평민들, 보통 사람들, 근대 시민들이 출현한 지도 벌써 수백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多衆 multitude)’의 시대인 21세기에 아직도 영웅 중심의 정치적, 사회적, ‘메시아주의’라는 유령이 우리 사회에 출몰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정치는 메시아 찾기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이름들은 숭배의 대상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컬트(cult)’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숭배자들은 자신들이 흠모하는 대상 바깥에서 사유(思惟)를 하지 않는다. 알뒤세르의 말 대로 “이데올로기는 그 내부에 모순을 갖고 있지 않다.” 이데올로기의 모순은 그 바깥으로 나와야만 비로소 보인다.
이 정치적 메시아들의 바깥으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숭배자들에게 이들은 절대적이고도 항속적인 진리의 담보자들이다. 친박, 친노, 친문, 친김 등의 용어들은 일종의 ‘초월적 기표(記標)’로서 그 아래 박, 노, 문, 김 등을 무오류의 성상(星象)으로 섬기고 의지하는 신도들을 거느리고 있다.
정치만이 아니다. 수많은 사회 조직들, 공장, 회사, 학교, 종교단체도 꼭대기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명령의 적절성, 정당성, 합리성, 윤리성에 대한 고려 없이 전체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달만 있을 뿐, 아래로부터의 소통이 없는 조직에 불평거리들이 없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대부분 이 불평은 명령이 시달되고 실천되는 현장이 아니라, 술자리의 뒷담화로 소비될 뿐이다. 군주들에게 밉보였다가는 온갖 손해를 감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최악이 경우‘갈릴’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저항의 힘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절박한 운명에 내몰린 사람들에게서 마지막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절대 군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일은 거의 드물다.
문제는 21세기 현재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는 정치적 메시아의 시대가 아니라, ‘다중’의 시대이다.
다중은 수적으로도 압도적 다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영웅 중심의 그 어떤 ‘대서사(큰 이야기, grand narrative)’로 통합되지도 않는다. 다중은 개체들이면서 집단이고, 집단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개체들이다.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사회적 메시아주의는 다중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안토니오 네그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권력이 생성에만 집중한다. 그들이 내놓는 대부분의 정책은 공공선(公共善)의 외피를 입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재생산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제 초얼적 기표로서의 ‘아버지들’과 헤어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대문자 ‘아버지의 법칙’ 대신에 다중의 이해에 복무하는 원리와 원칙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선거가 증명하듯이 우리 사회는 이미 ‘아버지의 유령’에 저항하는 수 많은 오이디푸스들을 생성하고 있다. 아버지의 권위로, 신화로 더 이상 소수 권력이 유지, 재생산되지 않는 시대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 심지어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에서조차 아버지란 이름만으로 존경받던 시대는 끝났다. 영웅은 없다. 오로지 다중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