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2,000년 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왜 세상의 중심 밖 한 켠으로 밀려난 갈릴리를 그 사역의 중심으로 삼으셨을까?”
이 단순한 호기심은 나로 하여금 그 시간을 거슬러 지금 이 땅의 세상 밖 한 켠으로 밀려난 공동체를 향한 사역의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 마가의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하며 수없이 언급 된 갈릴리의 무리와 군중 (오클로스 / ochlos)들은 세상 가운데 소외와 억압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생계를 위한 지속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가난으로부터 벗어 날 수 없었던 당시 식민 사회 구조 속 피지배계층 이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그 시대 정치 종교의 중심인 폐쇄적 율법 시스템에도 속할 수 없었던 철저히 소외된 이들 이었다. 이런 그들에게 표면적으로 보여진 경제적 가난보다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들이 속한 세상의 구조적 소외가 만들어 낸 ‘종교적 가난,’ ‘인간다움의 가난,’ ‘관계의 가난,’ 그리고 ‘자유의 가난’이었을 것이다.
▲ 공동식사 중에 가족 자랑을 하고 있는 마을주민
이 시대 이 땅이 경험하는 가난의 원인이 모두 그와 같다 주장할 수는 없겠으나, 가난은 언제나 시대를 초월해 그 결과적 형태를 공유하곤 한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가난을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여전히 수 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 경험된 민중의 가난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압박으로 시작된 가난은 비인간화의 고리를 매개로 끊임 없이 새로운 가난의 굴레를 만들어 가며 그 가난의 고리에 속한 모든 관계를 파괴한다. 그들이 고통 받는 소외는 이처럼 그들이 경험하는 물질적 가난과 함께 철저히 파괴된 관계 속에서 그 생명력을 강화 시키며 그 분리된 관계를 먹이 삼아 성장하고 있다. 이 관계의 단절은 미시적 차원에서는 빈곤을 경험하는 이들과 그들 주변의 관계를 단절시키지만, 거시적으로는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외부의 주류사회로부터 분리시키곤 한다. 외부에 대한 그들의 낯선 시선은 어쩌면 그들이 익히 받아온 외부로부터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절박한 대응은 아니었을까?
오랜 습관처럼 경험된 그들의 소외는 그렇기에 그리 쉽게 낯선 이의 방문을 허락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외지인 아무개가 아닌 그들 자신 조차 온전히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이것은 스스로의 모습을 온전히 발견해 내지 못한 우리 자신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잦은 실패를 겪는 이유와 같은 것 이리라. 그 낯선 시선과 함께 시작된 나의 어색한 동거는 그 외지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그들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와 동행하길 소망하는 낮은마음 공동체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은 그들에겐 세상으로 열린 작은 소통의 창구를, 그리고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첫발을 허락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