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 때에 왜 행복했는가?

연재칼럼 지난칼럼
오소영
한일수
김준
오클랜드 문학회
박명윤
수선재
천미란
박기태
성태용
명사칼럼
수필기행
조기조
김성국
채수연
템플스테이
이주연
Richard Matson
최성길
Danielle Park
김도형
Timothy Cho
강승민
크리스틴 강
들 풀
김수동
멜리사 리
Jessica Phuang
휴람
독자기고
정동희
EduExperts

내가 그 때에 왜 행복했는가?

0 개 1,042 명사칼럼

그제 10살이 된 딸내미와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과거 이야기를 좀 나누었습니다. 지금 수십 개의 티비 채널 중에 하나를 골라 볼 수 있는 딸내미는, 아빠가 어렸을 때에 채널이 몇 개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3개”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딸이 이해할 수 있는, 가급적 쉬운 언어로 제가 기억하는 1983년, 즉 제가 10살이었을 때의 레닌그라도 현실을 그녀에게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휴대폰”이라는 단어는 물론 없고, “전자오락”을 아마도 어쩌면 미국산 영화에서 가끔 보고 그 존재를 알게 되는 현실이고, 텔레비전은 아무리 3개 채널이 있다 해도 그 내용은 다 엇비슷하고, 휴식 방법으로는 제 주위에서 가장 흔한 건 독서나 숲 하이킹, 아니면 극장에서의 연극 관람 같은 것이었던, 그러한 삶을 그녀에게 설명한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해외 여행은 평생 한 번 갔다오면 천하 행운아 대접을 받게 되는 폐쇄 사회에다가, 철지난 감자와 저질의 쇠고기를 사기 위해서 상점에서 한 시간 이상 줄서야 하는 물자 부족 사회에다가,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이태리산 신발 하나 사자면 노동자 평균 임금의 4분의 1을 주어야 하는 내핍 생활에다가, 볼품 없는 국산 자가용을 사기 위해 10여년이나 줄서서 기더려야 하고 매일 버스나 무궤도전차를 타고 다녀야 했던 사회....라고 이야기를 하니 딸은 “이게 악몽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의 예상과 전혀 달리, “악몽”이긴커녕 나는 거기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고 답했습니다. 


행복이란, 성적순도 아니지만, 재산액 수순도 아니고 정보량의 순도 아닙니다. 물론 행복하자면 일단 “기본적 욕구”들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즉, (줄 서서 사는 한이 있다라도) 식량과 (비좁더라도) 살 집, 다녀야 할 직장, 그리고 기본적 사회 안전과 성욕 충족 등의 가능성 (친밀 관계 가능성) 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 욕구들이 충족되면 그 다음에는 물질적 번영의 증진이 가져다주는 행복 증진 효과는 상대적입니다. 즉, 예컨대 1983년 레닌그라도 36평방미터형 서민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이 100미터 넘는 서구 중산층 아파트로 이사가고 나면 처음에야 “편안해졌다”는 느낌이 크겠지만, 그가 살 아파트 평수가 나중에 조금씩 늘어나도 이미 “편안한 아파트”에 익숙해져 뇌에서 행복 호르몬의 분비가 일어날 일은 그다지 없을 겁니다. 기본 욕구들이 어느 정도 커버가 된 시점 이후로는, 1인당 GDP 숫자는 행복 지수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2021년 행복 지수로 치면 소득이 중간인 체코 (16위)는 고소득의 영국 (18위)보다, 역시 “소강 사회”인 대만 (19위)이 고소득인 프랑스 (20위)보다 각각 높이 올라간 겁니다. 참고로, 50위인 부자 나라 한국보다는 비교적 가난한 태국 (48위)이나 몰도바 (49위)는 더 높은 행복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뭘까요? 



뇌가 ‘행복’을 느끼자면, 두 가지 요소가 결정적입니다. 안전감과 소속감입니다. 뇌는 불안, 불확실성, 위험 요소 등에 바로 아드레날린 분비로 대응하는 거고, 그럴 경우엔 행복감은 가고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현재 “코리안 드림”이 있다면 바로 공무원 시험 통과와 “평생 철밥통”이 거기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러니 세계 행복 지수 랭킨을 봐도 불확실성이 강한 영미형 사회보다는 “철밥통”의 전통이 더 강한 북구 사회들은 늘 우위를 차지합니다. 1983년 레닌그라드에서는, 비록 상점에 가봐야 철지난 감자나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쇠고기 같은 것 밖에 안보였지만, 원칙상 ‘모두’들이 국영 기업이나 국가 기관에 종사하는 공무원들이었습니다. 물론 고급 공무원 (간부)이 결정권을 독점하고 저급 공무원 (노동자나 하급 인테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사회는 “사회주의” 이상과 사이 멀었지만, 좌우간 “공무원 사회” 속에서의 안전감이 주는 행복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평균 직장 근속 연수는 6년 정도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이와 같은 안전감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도스토에브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한 주인공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때에 가서 마음을 털어놓아도 될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1983년에 10살인 제가 살았던 사회에서는 적어도 “마음이 아프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포진돼 있었습니다. 대체로 평생이나 적어도 수십년 동안 매일 서로 얼굴 보고 살아야 할 직장 동료들끼리 서로 경조사를 챙기고 필요하면 서로에게 돈을 꾸어주고 서로 아이들을 맡아 봐주는 것은 당연지사이었습니다. 이혼율은 매우 높았지만, 그래도 혼자 사는 사람들의 숫자는 비교적 적었으며, 이혼하고 나서도 누군가와 또 다시 결합하는 경우들이 더 흔했습니다. 살기가 현실적으로 여러모로 어려웠던 만큼 “우정” 이나 “친구와의 관계”는 또 거의 절대시되어, “친구”란 대체로 필요하면 예고 없이 찾아와서 며칠 같이 묵을 수 있는 정도의, 매우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지칭했습니다. 그리고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등과의 소속 관계와 별도로, 그래도 대부분은 “지구를 보다 더 평등하게 만들려는 혁명 이후 사회”에 소속된 것을 다소 뿌듯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사회의 단점들을 다 알면서도 말이죠. 지금 1인 가구 비중이 40%나 되는 대한민국에서는, 만약 사람들에게 “아프면 가서 마음을 털 수 있는 친구”라도 충분히 존재했다면, 즉 원자화와 사회적 관계 단절이 덜 심각했다면 그래도 자살율이라도 좀 더 낮지 않았을까요? 


최신 휴대폰과 넷플릭스, 틱톡, 그리고 스냅차트나 인스타를 10분에 한 번씩 접속할 수 있는 것이 꼭 ‘행복’의 필수/충분 조건이 아님을, 아마도 제 딸내미도 결국 알 겁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알게 되는 그 시점에서는 이 후기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개인 고립화의 정도는 과연 어디까지 높아질까요?


* 출처 : 박노자 Vladimir Tikhonov 블로그


6290afc2715596f44c543eef9de22b2e_1636494355_0878.png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잊혀져 버린 정의, 그들을 기억하며

댓글 0 | 조회 261 | 3일전
▲ 항일 투쟁과 반독재 투쟁으로 점철된 생애를 담은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의 작가 김학철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작가였던 고 김학철(1916~2001)의 인생을 다룬… 더보기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댓글 0 | 조회 153 | 3일전
언젠가 TV에선 얼굴 없는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더군요. 미국에 얼굴 없는 사람이 있답니다. 그런데 아이입니다. 태어난 지 2년 반 쯤 되었는데 얼굴이 없답니다… 더보기

11월의 기도

댓글 0 | 조회 133 | 3일전
갈보리십자가교회 김성국주님!올해 겪은 놀란 일을더 여유롭게 견뎌내지 못해부끄럽습니다당신 손 놓치지 않을나를 뽑아 견디게 하셨으니슬펐지만 아름다움이었습니다기차역에서… 더보기

대자유의 맛, 다선일미의 차 명상

댓글 0 | 조회 117 | 3일전
예로부터 스님들은 차를 마시며 수행을 했다. 차가 수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벽암록』의 저자인 송대 원오 극근(圓悟 克勤:1063~1135) 선사의 다선일미… 더보기

욕실 리노가 망설여지는 이유

댓글 0 | 조회 560 | 3일전
최근 몇 주 동안 잘못된 욕실 설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계신 고객분들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욕실은 단순히 깨끗하고 예쁘게 마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안 보이는 곳… 더보기

사랑

댓글 0 | 조회 98 | 3일전
시인 정 호승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모든 애인들이 … 더보기

아오테아로아 (멀고 긴 흰구름의 나라)

댓글 0 | 조회 182 | 3일전
식물 줄기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삼각 돛,큰 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통나무 배,긴 나무를 균형지게 본체 좌 우측으로 동여맨 카누에 몸을 싣고,가족과 친지들을 뒤로… 더보기

전하지못한 이야기 ‘해금강’

댓글 0 | 조회 182 | 5일전
지인 j 님께!H 여사와 우리 셋이 모이면 노후의 삶을 어디에서 살면 좋겠냐는 말을 자주 했었지요.서울에서 나고자라 나이먹은 사람들끼리 시골살이를 동경하는 막연한… 더보기

지피지기 백전백승! 뉴질랜드/호주 의대 제대로 도전하기

댓글 0 | 조회 783 | 5일전
의대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심상치 않은 요즘, 뉴질랜드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전문직에 대한 직업 안정성과 지속성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면서 의대 치대 약대 등의 … 더보기

고요할 수록 밝아지는 것들

댓글 0 | 조회 161 | 5일전
경남대학교에서 86년부터 18년까지, 33년을 일 하다가 은퇴한 지 6년이 되어간다. 어느 사이 고희(古稀)에 들었고 앞만 보고 가려하는데, 원고 청탁을 받아 잠… 더보기

35. 몸의 진액 부족이 가져다 준 소화 불량과 다양한 문제들

댓글 0 | 조회 454 | 5일전
몸의 모든 신진대사 활동은 물, 더 정확히 말하면 몸의 진액과 관계된다. 그래서 진액이 고갈되면 다양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기계의 그리스나 윤활류가 부… 더보기

(A2+) 프리미엄 우유가 온다

댓글 0 | 조회 1,305 | 8일전
완전식품(完全食品)이란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소를 모두 갖춘 식품을 말한다.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요리가 아닌 가공하지 않은 원료 상태로 섭취해도 사람에게 필요한 영… 더보기

한국의대 입시 어디로 갈 것인가? 파트 2

댓글 0 | 조회 324 | 10일전
11월 14일 2025학년도 수능시험이 치러지고 수시전형은 11월 현재 진행중이며 내년 1월 정시전형을 앞두고 있다.2025학년도는 그 어느때보다도 많은 변화가 … 더보기

나는 이런 사람이 좋다

댓글 0 | 조회 344 | 2024.11.06
시인 헨리 나우헨그리우면 그립다고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불가능 속에서도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애쓰는 사람이 좋고다른 사람을 위해호탕하게 웃어 줄 수 있는 사람이 … 더보기

작가 한강의 노고를 기리며

댓글 0 | 조회 367 | 2024.11.06
▲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훌륭한 번역을 통해 세계의 독자들이 비로소 한국문학이라는 두꺼운 책의 한 … 더보기

받아 적고 읽어 주고

댓글 0 | 조회 167 | 2024.11.06
나는 타자(打字)가 서툴고 느리다. 재주가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타자하는 수고를 벗어나게 되었다. 말하면 그걸 글자로 바꾸어 주고(STT; Speech t… 더보기

달이와 함께 만난 동물 부처들

댓글 0 | 조회 143 | 2024.11.06
안동 봉정사 영산암 응진전 용과 사슴, 영덕 장육사 대웅전 사자와 코끼리사찰 곳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절을 아름답게 하고 이야기를 담는다.아이가 처음 세상을 배울 … 더보기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

댓글 0 | 조회 425 | 2024.11.06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 중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에 대한 내용이 생각난다. 4촌이 논을 사면 기뻐할 일인데 왜 배가 아파야… 더보기

Panic Attack

댓글 0 | 조회 495 | 2024.11.05
공황발작은 갑작스럽고 강렬한 불안감이 나타나는 정신적 증상입니다. 이 발작은 보통 예기치 않게 발생하며, 몇 분 안에 극심한 공포나 불안이 솟구치는 특징이 있습니… 더보기

New NCEA

댓글 0 | 조회 436 | 2024.11.05
대부분의 학부모님께서 이미 알고계시듯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 꼽히는 사교육의 천국입니다. 대형입시학원은 말할것도 없고 입시학원 입학을 위한 또 다른 입시학원, 취업… 더보기

34. 소화기관의 병은 이런 순서로 치료해 보세요

댓글 0 | 조회 324 | 2024.11.05
몸의 각종 부위 중에 피부와 점막들은 손상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외부 세계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질을 자주 접하는 신체 기관들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손상… 더보기

아플수록 마음관리를 잘 해야

댓글 0 | 조회 237 | 2024.11.05
장영희 교수님을 아시나요? 제가 이 분 글을 인용하면서 참 좋아했는데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휠체어에 탄 모습으로 환하게 사진을 찍었더군요. 열두 번 예정된 항암… 더보기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

댓글 0 | 조회 883 | 2024.11.02
한국인 232만명이 고혈압(高血壓), 당뇨병(糖尿病), 고지혈증(高脂血症)을 모두 앓고 있는 복합 만성질환자이다. 이 세 가지 질병은 동시다발적으로 생기며, 나이… 더보기

한국의대 입시 어디로 갈 것인가? 파트1

댓글 0 | 조회 494 | 2024.10.31
대한민국은 4대 개혁 의료개혁, 연금개혁, 노동개혁 그리고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그 중 의료개혁을 추진하며 2024년 2월 초 20여년동안 정원 변화 없이 한… 더보기

33. 음식, 식습관, 장건강, 심성 그리고 영성의 축

댓글 0 | 조회 410 | 2024.10.30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장건강을 지배하고, 장건강은 뇌에 바로 영향을 준다고 말해 왔다. 그리고 음식, 식습관, 장건강, 심성 그리고 영성이 하나의 축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