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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화암사와 파주 보광사의 목어
“이곳에도 부처님이 오실까요?” 가까스로 길을 물어 절에 다다랐을 때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무심코 새어나온 물음. 완주 불명산 시루봉 남쪽 깊고 깊은 골짜기에 저절로 슨 곰팡이 같은 절 하나 있다.
도대체 누굴까. 이런 곳까지 흘러들어 세속과 인연 잘라 절을 지은 심사가 되려 희극적이기도 하다. 아니면 천년 후쯤 내다 본 것일까. 누구라도 세상에서 상처받은 마음 투명해질 때까지 멀리 멀리 찾아와 슬픔도 사랑도 다 내려놓고 가라고 천년 후쯤 가서야 완성되는 오래된 미래 하나 미리 슬어놓은 것일까.
화암사 우화루에 비 내리자 목어는 스르르 줄을 풀고
노스님으로 변한다.
자신처럼 낡은 절의 곳곳을 돌며 하나하나 쓰다듬는다.
절이 깨달음을 시각화한 드라마라면 목어는
가장 빼어난 신스틸러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으로 빛나기도 한다.
이거구나, 이거였어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에중창된 그곳에 말라비틀어진 북어 한 마리 매달려 있다는 얘길 들었다. 세상에 온통 화려하고 자기 잘났다고 다투는 것들 투성인데 그 눔의 목어 한 마리가 눈엣가시처럼 걸려 지워지질 않았다. 단청 옷은 원래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가 없고, 풍파에 비늘도 살점도 다 벗겨지고 헤져서 뼈와 마른 형체만 남은 물고기.
그러나 형형한 눈알과 이빨은 그대로여서 그 집 방장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꼬장꼬장한 노스님 같은 목어. 그 희한한 물건을 실물 영접하고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끄덕끄덕, 이거구나! 이거였어!
본체만체 휙 하고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는 공연히 적묵당 툇마루에 놓인 책 몇 권을 만지작거렸다. 모두 오지에 조용히 늙은 화암사와 허물어질 것 같은 우화루, 괴이한 목어에 홀려 노래한 글과 시편들이다. 그대로 주저앉아 웅크리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투둑 투둑 하는 소리. 전각들이 ‘ㅁ’자로 어깨동무하듯 처마를 걸치고 있어 한옥 중정 같은 마당에 걸린 연등에 갑자기 비 떨어진다.
삽시간에 바짝 마른 흙 위로 빗물이 떨어져 둥근 원을 그렸고, 어쩌면 갯벌 위에서 눈 동그랗게 뜬 짱뚱어처럼 목어는 꾸욱 꾸욱 울음을 운다. 그제야 슬며시 목어의 얼굴을 쳐다보니 어찌 보면 해태 같기도 하고, 도깨비 같기도 하고, 어느 목판화에서 본 듯도 한 해학적인 탈바가지를 닮은 것도 같다. 그러는 찰나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우르르 쾅, 천둥번개, 소나기, 그리고 정전.
꽃비인가, 비꽃인가
처사님이 두꺼비집을 손보자 전기는 곧 들어왔지만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고 마침 화암사를 찾아온 대여섯 명의 방문자들은 뜻밖의 시공간에 불시착한 두꺼비처럼 주섬주섬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비를 바라보았다.
극. 락. 전. 또박또박 쓴 글자처럼 한 자 한 자 별도로 된 현판이 간격을 두고 매달린 것이 특이하고, 건축학적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하앙식 목조건축이라는 극락전은, 국보 제316호다.
그 앞에는 네모난 마당이 드리워져 있고, 정면으로 우화루가 멍석처럼 죽 펼쳐져 덧붙여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입구도 출구도 없이 돌벽으로 꽉 막힌 성 같은 공중누각이지만 올라와 바라보면 그저 마당에 덧붙여진 넓은 마루에 지붕만 얹은 꼴이다. 우화루 끝에 난 벽면 세 개의 판자 창은 창살 따위 불필요하다는 듯 비가 쏟아지는 데도 개의치 않고 귀찮은 듯 펑 뚫려 있다.
꽃비인가 비꽃인가, 우화루에 소나기가 쏟아지자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거기 붙들고 있었다는 듯 스르르 목어가 줄을 풀어 화암사를 피어나게 한다. 마치 정지된 그림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마법을 풀고 새 생명을 얻어 춤추듯이 극락전 우화루가 덩실덩실 살풀이를 한다.
이 목어, 이 뭣고
보통 종각 안에 매달려 사물의 하나로 쓰이는 목어는 몸은 물고기지만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서 부처로 화하는 깨달음에 대한 판타지일 것이다. 그러나 화암사 목어는 거꾸로 간다. 짱뚱어 같은 얼굴에서 단순한 곡선의 몸통을 하고 있고, 어찌 보면 다 헐어 이 빠진 할머니 같은 얼굴과 구부정한 등을 지나 꼬리로 시선을 옮겨 갈수록 시간은 거꾸로 흘러 나를 저 먼 태초로 데리고 간다. 최초의 나로. 사랑도 미움도 없는 뻥 뚫린 존재, 마음도 헛됨도 없는 빛 그 자체로.
참배 시간이 지나 대웅전 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더 그랬는지 비오는 화암사의 주인공은 목어였다.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화암사는 극락전과 우화루의 긴장감 있는 조화로움 속에서 목어는 쇠락의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표정을 보여준다. 해인사 싸리비 다음으로 내 마음의 국보 2호로 멋대로 지정한다.
한 시간 남짓 소나기가 내렸고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신비체험은 계속되었다. 화암사에 우화루에 북어가 매달려 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북어 한 마리가 화암사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늙은 개 한 마리가 앞장서 잘 늙은 사람을 인도하고 가는 것과 같은 곡진한 풍경이다.
목어는 법고, 범종, 운판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소리를 내어 삼라만상을 깨워 부처님의 길로 인도한다. 물고기 모양의 목어는 배 부분을 파내서 그 속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본래는 대중을 모이게 하는 신호 용도로 쓰이다가 차츰차츰 단순화되고 휴대할 수 있게 되어 독경이나 의식을 할 때 쓰이는 법구로 변해 목탁이 되었다고 한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아 수행하는 사람도 밤낮으로 쉬지 않고 정진하라는 의미도 있다. 더욱 진귀한 것이 있는데 화암사 목어 뒤쪽 우화루 기둥 하나에는 목어와 목탁의 중간쯤 형태인 투박한 물건이 달려있다.
보광사 목어의 노래
오래된 목어로 종각이 아니라 대웅전 앞에 매달려 있고, 정교한 조각으로 세련미가 있는 파주 보광사 목어도 빼어나다. 몸은 비늘이 있는 물고기이고 머리는 용의 형태로 길이가 287cm인 대물이지만 보면 볼수록 그 균형 있고 섬세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홀리게 된다. 특히 만세루 툇마루에 올라가면 코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 입안에 물고 있는 여의주와 머리에 난 뿔까지 어찌나 그렇게 솜씨 있게 깎아놓았는지 혀를 내두르게 된다. 감상에 지치면 그대로 목어 아래 툇마루에 앉아서 허리를 펴고 눈을 감아 마치 목어의 뱃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환상 속으로 빠져들어도 좋다.
파주 보광사는 서울 근교에 있지만 고령산 아래에 자리한 고즈넉한 절이다. 대웅보전 벽면을 판자로 끼운 판벽이 독특하고, 문수 동자와 선재 동자 등을 세밀하게 그린 판벽화가 아름답다. 목어가 달려 있는 만세루도 건축미가 있고, 대웅전 옆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의 후불벽화에도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된다. 보광사 참배를 마치고 뒤편의 등산로를 조금 올라가면 전나무숲이 펼쳐진다. 숲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고즈넉이 절의 뒷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운치가 있다.
“이곳에도 부처님이 오실까요?” 처음 가졌던 의문을 다시 품어본다. 높은 전나무를 올려다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온통 푸르름, 희끗희끗 하늘이 엿보인다. ‘훔’ 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나무 향과 청량한 기운이 몸속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 안에서 부처님의 온화한 가피를 느낀다.
목어, 매달린 나무 물고기가 나 같다. 가끔씩 누가 쳐주면 꾹꾹 소리를 크게 내어서 절에, 세상에 매달려 사는 신세 갚는 짐승.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무명 배우 같은 목어를 그리 귀히 대해주시나 놀라는 표정이다. 제 몫의 두 배는 하는 착한 일꾼 같은 목어에게 깊이 삼배하고, 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새 비는 그쳤고 살짝 젖은 옷도 금세 말랐다.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