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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을 넘어서고 나서부터 내 지능은 머리카락처럼 점점 더 하얘져만 간다. 이런 나에게 대놓고 무식하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농담 섞인 말이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섭섭하지도 않다. 어쩌면 그 무식함을 즐기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2살짜리 손녀도 디지털 TV리모컨을 제대로 못 다루는 할머니의 무식함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지경이다.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아왔던 내가 만들어낸 결과이며,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이 약한 까닭이기도 하다.
나에게 우리 가족들은 무척 관대했다. 집안에서 여왕처럼 굴도록 내버려 뒀다. 무식한 게 무기이도록 내버려 뒀다. 언제든지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특히 영어에 있어서는 더 그래왔다.
당신의 이름 석 자만 쓰고 읽을 줄 알았던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살림도 잘하시고 요리도 잘하시고 바느질도 잘하시고 현명하기 그지없으신데, 한글은 못 깨우치셨다. 차일피일 미루시다가 결국 이름 석 자 쓰는 걸로 끝을 내신 거다.
내가 타국에 와서 할머니와 같은 처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할머니도 나처럼 여러 번 시도해 보셨을 거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한글을 못 깨우친 데에는 잠재의식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몰라도 살 수 있다는 생각도 한 몫했을 것이고.
나라고 우리 할머니와 다를 게 뭐가 있겠나? 무식하다는 말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우리 할머니가 무식하셨다고 100% 인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식한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무식함을 인정하고 수용하게 된다. 그렇다고 영원히 무식하게만 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젊은 사람들 속에서 친절한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함께 공부하고 여행했다. 그러는 동안에 굳은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하느라 애썼다. 네트워크 시대에 발맞춰 가기위한 노력이었다.
9월 초에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을 위한 2주의 합숙 생활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 같다. 상위 스폰서들의 열정과 사랑을 고스란히 받은 경험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서 한 달 반 동안 혼자서 대도시 생활을 해나갔다.
성남시 모란시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 놓고, 지하철과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코로나에 걸려 혼자 버티며 고생하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독감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코로나였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한 겨울 보다도 더 춥게 느껴지는 한국을 뒤로 하고 집에 도착하니, 여독과 더불어 코로나 후유증으로 한동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현저하게 떨어진 체력으로 주치의를 만나니 혈액 검사 결과가 엉망이었다. 한국 가기 바로 전까지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피를 많이 흘렸느냐고.
요즘의 나는 한여름의 정서를 즐기며 산책을 한다. 마트에서 잘생긴 배추와 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와서 김치를 담근다. 한결 좋아진 입맛으로 텃밭의 채소에 삼겹살 구이와 쌈장을 얹어서 맛있게 먹는다. 코로나 후유증. 이 또한 다 지나간 것이다.
1년 전부터 줌 미팅을 통해 사업에 필요한 수업을 일주일에 한두 시간씩 듣고 있다. 한국어로 수업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영어로 수업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수업이니, 못들을 것도 없다. 들리건 안 들리건 무조건 듣는다.
1년이란 세월이 참 빠르게도 지나갔다. 새로운 걸 배우는 게 힘들어서 회의를 느낀 적도 몇 번 있었다. 젊은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에게는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인문학 강연은 재미있었다.
앱 사용을 하는 단순한 작업까지도 왜 그렇게 힘들고 버거웠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배우고 익힐 게 너무 많고 경험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들이 쌓여 있지만, 처음의 암담함으로부터는 많이 벗어났다. 하면 된다는 생각도 든다. 장족의 발전이다.
이틀 전에 귀 청소를 하러 갔다. 2년 전에 내 귀지 상태가 엉망이었을 때 아주 친절하게 잘 치료해주었던 분을 만났다. 일반인들과 달리 내 오른쪽 귀의 귀지는 6개월마다 빼내어야 했다. 젖은 귀지가 굳어서 귓속 벽에 단단히 붙어버리기 때문이다.
치료 첫날에 귀지를 떼어내는 시도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며칠 후로 미루게 되었다. 그동안 올리브 오일을 귓속에 떨어뜨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하고 다시 찾아가니, 아프지 않게 잘 떼어서 꺼냈다. 그날의 치료는 무료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이후로 6개월마다 그녀를 찾아갔고, 그때마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집으로 왔다. 슈퍼 골드 카드가 나오기 몇 달 전에도 시니어 가격으로 치료를 해주는 것을 보면서 그녀의 심성이 무척 착하다는 걸 알았다. 항상 손님이 만원인 이유를 알 것 같다.
며칠 전에 그녀를 찾아갔을 땐, 작은 신년 선물을 하나 가지고 갔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 물건 들 중 하나인데, 핸드크림이었다. 4개 한 세트에 $25 인데, 그 중 하나만 가지고 갔으니, 부담감 없이 받을 수 있는 $6.25 짜리 선물이었다.
아주 싼 거라고 말했는데도 그녀는 감동의 눈빛으로 귀 청소 요금을 받지 않겠단다. 뒤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냥 넘기면 안 될 거 같아서 집에 있는 몇 가지 생필품들을 챙겨 숍에 살짝 놓고 왔다.
지금 그녀는 내 회원이 되었으며, 친구가 되었다. 이번 주 며칠 만에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보다 내 영어가 많이 늘었다고 하면서 격려까지 아끼지 않는 그녀. 우리는 짧은 사이에 너무나 가까워졌다. 네트워크 마케팅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Thank u my friend
Have a lovely night” 라는 그녀의 메시지를 받고 너무 기뻤다.
앞으로 나는 네트워크 마케팅을 통해 많은 친구들을 사귈 예정이다. 지루하고 심심한 파미에서 성곽을 쌓고 그 안에서 왕비마마 행세를 했었던 내가 성곽의 문을 활짝 열게 된 건 모두다 네트워크 마케팅을 하겠다는 용기 덕분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나는 이상한 용기가 난다. 뉴질랜드에 올 때도 이상한 용기 덕분에 오게 되었는데, 이 사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2001년 2월 새벽에 파미 역에 도착했던 그 순간이 떠오른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어린애들을 기차에 태워서 담요를 덮어 재워가면서 밤을 지새웠더니, 어느덧 파미에 도착했다. 겨울처럼 추웠던 새벽 공기. 차가운 공기 안에 희망이 들어 있었다.
지금 나는 그때의 희망이 되살아나고 있다. 하늘과 땅이 다 노한 듯 이상기온으로 온 세상이 들썩 거리고, 지진과 해일이 땅을 고르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 2024년은 청룡의 기상으로 솟아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이상한 용기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2024년의 청룡열차가 어디까지 갈지 잘 모르겠으나, 단순하게 무식하게 지극정성으로 열정을 담아 느긋함을 잃지 않으며 정도의 레일 위를 달려가리라. 아자 아자 아자!!!
▲ 서양화 화가 김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