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사찰음식 초짜의 사찰 탐방기
무던히 잘만 달리던 소나타가 비탈길을 만나 고속의 알피엠(rpm)으로 헐떡이더니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연이은 굽잇길에 휘청였다. 좌회전, 우회전, 다시 좌회전…. 되레 유턴의 연속인 도로 사정은 폐광과 함께 몰락한 탄광촌의 회한만큼 얽히고 설켰다. 차체는 팔세토 창법으로 고음을 내지르며 칸타타로 장르를 변경한 지 오래. 한동안 석탄을 나르던 길, 운탄고도를 달려 해발 800m 고지에서 망경산사를 만났다.
화엄의 세계에서 꽃명상
자작나무 군락을 병풍 삼아 자리한 망경산사. 일주문도 사천왕도 없는 절이라 대웅전 현판마저 없으면 잘 가꾼 산장이라 착각할 법했다. 모란, 꽃잔디, 금낭화, 매발톱, 철쭉…. 철을 잊고 봉오리를 터뜨린 꽃들이 오후의 햇살에 명징하게 반짝였고, 기품을 머금은 모란꽃 내음은 투명한 공기에 섞여 절을 에워싸고 있었다.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예밀리. 판타지 소설에 등장할 것 같은 주소만큼이나 비현실적인 풍광은 스릴 넘치던 직전의 험로를 잊게 만들고도 남았다.
딩동~! 환희에 젖어 꽃으로 결계한 망경산사로 체크인했다.
오후 3시 즈음,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운탄고도 걷기 프로그램을 마치고 복귀했다. 망경산사는 운탄고도 1330 걷기 코스와 영월의 특산품인 캠벨 포도 와인으로 족욕을 체험하는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들은 이름 대신 홍천, 대전, 단양, 양평이라 서로를 호명하는 중년의 참가자 6명과 프랑스와 싱가폴, 창원에서 온 4명의 청년을 더해 도합 10명이었다. 어떤 연으로 여기에 닿았을까? 자못 궁금해지는 조합이었다.
30분 휴식 후, 최복희 숲해설가의 인솔로 사찰 안내가 시작됐다. 망경산사는 광부들이 떠난 마을의 건물들을 개조해 활용 중이라 사찰 안내는 꽃과 약초밭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넓은 면적에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식재된 덕에 다종다양한 식물을 짧은 시간 안에 만나볼 수 있었다. 미나리아재비, 골담초, 쥐오줌풀, 병아리꽃나무, 봄맞이꽃 등 꽃을 틔운 야생화부터, 병풍취, 터리풀, 도깨비부채 등 재미난 이름의 여러해살이 풀들이 산책길을 따라 줄지어 자라고 있었다. 숲해설가의 말을 빌리자면 “산림청 관계자들도 여러 식물을 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여기 말고 유래가 없다.”라며 놀랐다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0여 종의 식물자원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절 자체가 한 권의 식물도감이라 할만하기 때문이다.
꽃구경은 명상에 가까웠다. 친절한 설명에 이끌려 종마다 발하는 고유의 아름다움, 그들이 전하는 생명의 기운에 취해 자연과 어울리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바람이 선사하는 동심의 순간
산책길의 끝, 언덕 위 나무 그늘 밑에서 주지인 하원 스님이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은 그 자리가 늦은 오후에 풍향이 바뀌는 곳이라며, 참가자들도 뙤약볕을 잠시 피해 그늘 밑으로 숨어들기를 권했다. 서늘한 바람에 등을 기대어 언덕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목가적인 풍경을 만끽했다. 스님은 언덕 아래 복사꽃이 만발했던 지난봄을 회상하며 아이처럼 동요 <뻐꾸기>를 흥얼거렸다.
뻐꾹 뻐꾹 봄이 가네/뻐꾸기 소리 잘 가란 인사/복사꽃이 떨어지네/뻐꾹 뻐꾹 여름 오네/뻐꾸기 소리 첫 여름 인사/잎이 새로 돋아나네.
스님은 “동요지만 이 짧은 노래에도 자연의 이치가 담겨있다.” 라며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고 순간순간 깨어있기를 당부했다. 다시 스님의 선창을 따라 참가자들이 합창하자 언덕 위에 복사꽃 대신 동심이 만개했다. 하나가 일체인 듯, 일체가 하나가 돼 꽃망울을 틔웠다.
더위를 식힌 후 샤스타 데이지로 레이스를 두른 잔디광장에서 명상이 이어졌다.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고 편하게 호흡하라는 스님의 지도로 시작된 명상은 의도치 않게 낮잠이 돼버렸다. 운탄고도를 거닐며 쌓였던 참가자들의 피로가 웃자란 잔디의 포근함 속으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밭을 일구는 마음
저녁 공양을 앞두고 지도법사인 청하 스님과 함께 산나물 체험에 나섰다. 공양에 쓰일 나물을 채취할 참이었는데, 지역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참가자분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그들은 한국임업진흥원의 지역별 매니저로서 임업을 운영하는 지역민들을 돕고 있다며, 산나물로 유명한 망경산사에 견학차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한다. 그중 단양 매니저는 직접 농장을 경영하며 우프(WWOOF)를 운영하고 있고, 다국적 4명의 청년들은 우프를 체험하다 망경산사에 따라 온 경우였다.
우프는 유기농가와 자원봉사를 중개하는 범지구적인 운동으로 참가자는 노동을 제공하는 대신 우퍼라 불리는 농장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는다. 금전의 보상 없이 농사지으며 문화를 경험하는 청년들이라…. 딴 세상 얘기 같았다.
구성원들의 면면 때문일까? 밭에 모인 이들은 하나같이 산나물에 진심이었다. 곰취, 청옥취, 도솔취, 전호, 어수리, 파드득 나물, 영아자 등등. 청하 스님은 잰걸음으로 앞서가며 나물의 이름과 맛, 효능과 조리법뿐만 아니라 생육환경까지 망라해 설명하곤 생으로 취식이 가능한 나물들을 조금씩 떼어 무리에게 건넸다. 풋사과, 오렌지, 토마토, 바질, 박하…. 초록 일색의 풀잎들이 각기 과일과 채소의 다채로운 맛으로 입안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본디 그 나물 고유의 맛이었으나 표현할 길이 막막해 다른 사물로 대체해 형용할 뿐이었다. 이런, 낭패가! 나물 앞에서 한없이 겸허해졌다.
임업 전문가인 매니저들은 망경산사의 나물이 타 지역에 비해 풍미가 월등한 이유가 높은 고도와 천혜의 자연환경이 빚어낸 조화일 것이라 추측했다. “호미로 사경했지요. 도량 구석구석 스님들 손이 안 간 곳이 없어요. 저희도 농부랍니다.” 청하 스님이 말을 보탰다.
불경을 붓으로 옮기는 수행법 사경. 땅을 종이 삼아 호미로 부처의 가르침을 그렸다는 스님의 말씀에 제빛을 밝히며 존재하는 망경산사의 만물 일체가 부처님의 가피를 머금고 있다고 상상했다.
형용할 수 없는 진귀한 것
끼니마다 밭에서 따온 푸성귀로 성찬이 차려졌다. 아침 공양 후 채취한 나물은 점심 공양에 쓰이는 식이었다. 재료마다 개성을 잃지 않도록 최소한의 양념으로 세심하게 조리된 음식들은 정갈하고 제맛을 냈다. 햇살과 바람으로 띄운 집간장이 비법일 수도, 한랭한 기후가 키워낸 우수한 식자재가 비법일 수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농부라 부르며 매일을 하루같이 산과 밭을 도량 삼아 가꾸는 스님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걸 모를리 없었다.
음식은 모두 속에 편했고, 신기하게도 식사를 마친 이튿날까지 산나물의 잔향이 몸에 남아 내가 밭이 된 기분이 들게 했다.
‘공양도 수행의 일부이니 1박 2일 동안 제대로 몸과 마음을 닦았구나.’ 뿌듯함이 차올랐다.
낡은 제도를 단박에 뒤엎어 새 질서를 세우는 일을 혁명이라 부른다면, 1박 2일간 망경산사에서 얻은 체험은 혁명이겠다.
내 세 치 혀는 낡았고, 세 끼니는 미각 너머의 신세계를 펼쳐 보였다. 갖은 미사여구와 별별 형용사를 동원한들 그 실체를 드러내는 일에 실패할 것이란 걸 알기에, 고백하건대 진작부터 난 그 맛을 옮겨 적길 포기했다. 대신 교조적이고 다소 경도된 이 글로써나마 그 진귀함이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취재를 마칠 즈음 최명서 영월군수가 기관장들과 함께 점심 공양차 절에 들렀다. 평소에 망경산사를 자주 찾고, 타지에서 손님이 방문하면 꼭 이곳에 모시고 온다는 그에게 망경산사 사찰음식에 대해 물었다. “맛있고, 무공해라 건강하고, 치유받는 느낌이라 좋다.” 간단하지만 충족한 답변이 돌아왔다.
귀경길, 팔방으로 요동치며 운탄고도를 미끄러져 내리던 차 안에서 밤이면 별빛에 반짝인다는 잔디광장의 샤스타 데이지를 떠올렸다. 주지 스님이 명상 시간에 지나가듯 하신 말인데, 지난밤 미처 둘러보지도 못했던 그곳에 내가 앉아있을 날을 손꼽고 있었다. 하늘을 멘 별들과 땅 위에 번진 꽃밭의 풍경이라니! 생각만으로도 겨웠다. 가을이 오기 전, 망경산사에 들를 이유가 분명해졌다.
■ 영월 망경산사
강원도 영월군 망경대산길 135-6
033)374-8007
https://www.templestay.com/temple_info.asp?t_id=mangkyung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