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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엄마와 로원 양의 해남 대흥사 템플스테이
해남 대흥사 차 덖는 날, 푸릇푸릇 진녹색으로 변해가고
차도 덖고 마음도 닦고, 웃음도 피고 새도 울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에 가까워진 날!
땅끝마을 해남 대흥사의 배경인 두륜산을 올려다보면 족두리같기도 하고 얼굴 같기도 한 두륜봉과 이어진 능선을 따라가면 가련봉과 노적봉은 가슴에 모은 두 손 같아서 꼭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이다.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 7군데 중에서 가장 최남단에 위치한 대흥사는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가장 빼어나다.
7살 소녀의 기발한 산사 체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서산 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이라 하여 그의 의발을 보관하고 기념하는 사당인표충사가 있고, 추사의 글씨가 적힌 대광명전과 더불어 전국의 선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엄격한 공간인 동국선원이 있다.
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시서화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으며 유불선 학문에 통달한 초의 선사가 입적할 때까지 일지암에 기거하면서 한국 차문화의 성지로 만들었던 유서 깊은 곳이 바로 대흥사다.
바로 이곳 대흥사에 녹찻잎이 새록새록 돋아나고 차 덖는 구수하고 영롱한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날 때 새잎처럼 파릇파릇한 일곱 살 김로원 양과 엄마인 황민하 씨를 비롯한 세 여인이 아주 특별한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 모였다.
맑고 푸른 날이었고, 세상이 온통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지는 날이었다. 세상의 어떤 슬픔도 성냄도 끼어들 틈 없이 감정의 때가 묻기 전 생기와 발랄 그 자체인 일곱 살 소녀 로원에게 모든 것은 새롭기만 하다. 감각과 행동 사이에 생각도 마음도 없고, 즉각적인 반응과 끝없는 호기심, 판단과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고 지금 여기를 사는 아이가 부처다. 물론 엄마의 눈에 다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겠지만….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대흥사는 여러 번 와봤지만 템플스테이는 처음이다. 아침 일찍 도착하여 대웅전과 천불전에 참배하고 일지암으로 향했다.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초의 선사가 직접 찾아가 반년을 함께 살기도 했고, 추사는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는 뜻의 명선(茗禪)이라는 글씨를 써서 선물하기도 하는 등 두 사람은 평생토록 우정을 나눴다. 제주도에서도 가장 먼 남쪽 끝 가시 많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혀 살던 김정희가 사무치게 그리워했을 초의 선사의 거처인 일지암에 올라와 보니 멀리 남쪽 바다가 보인다. 초의도 매일 저 바다를 내려다보며 바다 건너 절해고도에 귀향살이 하는 벗 추사를 그리워했겠지.
추사와 초의의 마음으로 대상 없이 그리워하자니 음정은 기억나지 않는 트로트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떠올랐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이 노래가 왠지 부처님을 향한 찬불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노래 가사를 만트라처럼 외우며 일지암을 뒤로하고 내려오다가 갈림길에서 북미륵암으로 다시 올라갔다.
다음날 로원이와 세 여인이 법은 스님과 함께 오게 될 북미륵암을 먼저 보게 된 것인데, 왼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마애불의 입체감을 더해주어 저절로 몸을 숙이게 되는 신비로움을 경험했다. 두륜산 높은 곳에 위치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은 10세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국보 제308호로 장엄함과 엄숙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불상 자체의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머리 부분의 광배와 구름, 하단의 비천상까지 그 섬세함과 조형미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마애불 곁에 모셔진 삼층석탑이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고, 돌아서서 더 높은 곳을 쳐다보니 등대처럼 서 있는 또 하나의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절묘한 배치와 긴장과 균형에 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에 놓인 삼층석탑의 비밀(?)은 다음날 법은 스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점심 공양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러 하산했다.
화두도 내려놓고 녹차 수행
대흥사 템플스테이 지도법사인 법은 스님과 김경숙 팀장이 아이처럼 환한 얼굴과 바지런한 인사로 우리들을 맞이한다. 방사를 배정 받고 대흥사에서 특별히 디자인한 세련된 법복으로 갈아입은 후 바로 녹차 밭으로 향했다. 법은 스님이 손뼉을 치자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뛰어 온다. 자세히 보니 앞 발 하나만 하얀 운동화를 신은 것처럼 탈색이 되어 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짝짝이란다. 일곱 살 로원이가 손을 내밀지만 쉽게 잡혀주지 않는다. 로원이와 짝짝이는 곧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세 여인의 관계도 독특하다. 김희경 씨를 중심으로 모인 관계이긴 하지만 이다혜 씨만 친분이 있을 뿐 민하, 로원 모녀는 초면인데 순식간에 친해지더니 어느새 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법은 스님은 로원이의 삼촌처럼 다정하고 굳건했으며 이 모든 것을 이끌고 간 것은 어쩌면 로원이의 타고난 성정 때문인 듯도 하다.
찻잎은 한 싹에 두 잎이 붙어 있는 것을 손톱으로 끊어 딴다. 차밭에는 벌써 울력을 나온 대흥사 스님들과 자원봉사를 나온 분들이 채반 가득 찻잎으로 채워가고 있었다. 이 계절에는 대흥사 전체가 차 따고 덖는 일로 바삐 돌아간다. 무슨 절집이 이렇게 분주할까 싶은 생각도 잠시. 찻잎을 포착하고 따는 손길이 점점 빨라진다. 이 시기가 되면 대흥사 선승들도 화두를 잠시 내려놓고 차 만드는 일에 용맹정진한단다.
찻잎 들어갑니다!
따온 찻잎을 쫙 펼쳐놓고 골라내는 사이 차 덖는 가마솥에 불을 지핀다. 물을 조금 떨어트려 튀는 것을 보며 온도를 가늠하고는 “들어갑니다!”하고 녹차 잎을 쏟아 첫 번째 차 덖는 일을 시작한다. 300도까지 올린 고열로 덖는 극열제다법이 초의 선사로부터 내려온 대흥사 차 맛의 비결이란다. 또 일차로 덖어 ‘살청’을 마친 것을 펼쳐놓고 밀가루 반죽하듯이 밀어 비틀고 주무르는 ‘유념’ 과정을 거치는데 이 때 찻잎의 세포막이 터져서 맛과 향이 풍성해진다. 온도를 달리하여 이 과정을 9번을 거쳐서 건조하게 되는데, 남해의 바닷바람과 두륜산에서 불어 오는 육지의 바람이 만나고 맑은 물과 흙, 부처님의 원력까지 깃들어 마침내 최고의 차가 완성된다.
어느새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고 드디어 저녁 공양시간. 절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맛있지만, 차 덖는 울력을 하고 나서 먹는 맛이 꿀맛이다. 더군다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남이 해주는 밥이다. 세 여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로원이를 챙기는데, 이제 누가 엄마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다.
잠깐의 휴식 뒤에 이어지는 저녁 예불시간. 대웅전은 단청을 새로 입히느라 가설물이 둘러쌓고 있었다. 추사가 귀향가면 떼라고 했다가 나중에 잘못했다며 다시 바꿔 달으라 했다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가려져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왼편의 ‘무량수각’ 추사의 글씨 앞에 서자 그의 마음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다. 과장하면 두륜산 전체가 사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블록버스터급 산지승원인 것에 비해 대웅보전은 검박하여 그 대조되는 아름다움이 더욱 증폭되어 다가온다. 마블 히어로 같은 능력자 법은 스님이 어느새 가사장삼을 수하고 엄숙하게 저녁 예불을 집전하고 있었다.
잘 따라가면 되는 길
대흥사 부도전에는 고승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는데, 서산 대사와 초의 선사의 부도도 안치되어 있다. 평소에 그냥 지나치던 부도들이었는데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보자 낱낱이 달라 보였다. 대흥사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있는데 연리근다. 두 나무가 자라다가 몸통이 붙어 한 몸이 되는 연리지와 달리 연리근은 같은 뿌리에서 나와 두 몸이 되어 자라는 나무다. 연리지가 속세에서의 인연을 상징한다면 연리근은 속세 이전의 우리가 알 수 없는 더 오래된 인연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이승과 저승까지도 같은 뿌리가 아닐까 생각도 잠시, 다음은 연등 만드는 시간이다.
공양간이 있는 만월당 안쪽의 넒은 방에서 우리는 둥글게 둘러앉아 각자의 연등을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 상처 입은 내 마음과 상처받은 네 마음에 반창고를 붙이듯이 연꽃잎을 꼭꼭 눌러 붙였다. 다시는 아프지 말자고, 아파도 조금만 아프자고 마음을 다독이면서….
로원이는 중간에 싫증이 났는지 엉뚱한 곳에 풀이 묻어버려 망쳤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니까. 어린이집 교사를 오래 한 두 사람은 모처럼 안내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아주 기분이 편하고 좋은가 보다.
누구를 가르치고 이끌어 가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은 그 어려운 길을 내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잘 따라가기만 하면된다.
연등을 다 만들고 나서 불을 켜니 웃음꽃이 활짝 핀다. 스님을 따라 밖으로 나가 탑 주위를 돌았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어디선가 짝짝이가 나타났고, 로원이가 같이 뛴다. 이제 제법 친구가 된 것 같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날이 바뀌어 새벽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을 한 뒤 기대 반 두려움 반인 이틀째 일정은 두륜산 포행이다. 바지런한 김경숙팀장과 법은 스님이 벌써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길을 걷는 것도 산을 타는 것도 뜻을 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다가 각자 바위에 앉아 참선 명상을 하고, 다시 걸었다. 산속에 로원이의 웃음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날아올랐고, 법은 스님의 장난스럽고 의미로운 말씀이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했다. 어느덧 두륜산 꼭대기가 훤히 보이는 너럭바위에서 우리는 녹차를 마셨다. 찻잔과 꽃, 방울토마토와 정성이 가득한 천상의 풍경 속에서 맛보는 극치의 맛.
굽이굽이 숲길을 따라서 내려가는지 올라가는지 모르게 가다보니 북미륵암에 당도했다. 마애불 앞에서 명상을 하고 왼편 삼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 탑의 비밀은 기단석에 있었다. 부처님 손바닥처럼 깎아놓은 받침 위에 석탑이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위에 우리도 지금 서 있다.
북미륵암에서 왼편으로 난 길을 가면 오래지 않아 천년수를 만나게 된다. 대흥사의 시원이라는 설이 있는 폐사지 만일암터에 있어서 만일암터 천년수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님은 가장 나이가 많은 느티나무로 수령 1,200살로 추정된다. 더구나 산 정상 가까이에서 이렇게 홀로 오래 살아온 나무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무 앞에서 합장하고, 나무의 기운을 느껴본다. 나무에 몸을 붙이고 나무의 숨결을 받아 들여본다.
“나무여! 태양과 지구의 기운을 받아 하늘로 뻗어 오른 생명이여!”
나무 조금 위쪽에 풀숲과 함께 나무를 지켜주고 있는 만일암 오층석탑에 인사하고 하산했다. 템플스테이의 감동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대흥사 템플스테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 뒤 삶이 좀 바뀔 것 같았다.
“첫 템플스테이 체험은 제가 이 절의 한 부분이 되어 자연스럽게 절과 어울리게 되고 편안함을 찾게 되어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이었습니다.” (이다혜 씨)
“연등을 만들어 불을 켜고 또 새벽예불을 함께 하면서 맑아지는 정신은 대흥사만의 매력이었습니다.”(김희경 씨)
“아이와 함께 너무나도 유익한 날들이었습니다. 소복소복 눈이 내릴 때 다시 와 보고 싶습니다.”(황민하 씨)
■ 해남 대흥사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061-535-5775 I http://www.daeheungsa.co.kr
■ 출처: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 매거진(vol.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