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전자레인지에서 땡 소리가 나고 노란 콘칩 위로 더 노랗게 치즈가 흐르는 접시를 내 앞에 놓으며 요셉씨 부인이 말했다. “이거 나초인데 한국에는 없죠?” 나는 ‘미’ 음계로 내 기분은 끄떡없다는 듯이 답했다. “먹어 봤어요. 강남역에 타코벨도 있었던 걸요.” 앞서 한국에서는 사라다만 먹지 진짜 샐러드를 모른다는 말을 들은 터라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미국에 온 이들 가운데 몇몇은 차별을 관심인 줄 알고 흘렸다. 2002년, 내가 한국에서 데려온 새댁으로 불리던 때 일이다.
“중국엔 달력 없죠?” 연말에 달력을 홍리씨에게 건네며 김 과장이 한 말이다. 질문이라 생각했겠지만 차별이었다. 조선족인 홍리씨가 남편 따라 서울에 온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홍리씨는 부드럽게 말했다. “네. 없어요.”
나와 홍리씨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이주해 살아온 기간? 아니면 무시 발언 속에 드러난 그 사람이 살아온 세상을 무시하지 않으려는 배려? 홍리씨는 황당해서 상대의 세상을 확장시켜 줄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고 했다.
차별은 개인 관계 속에서 훨씬 복잡하다. 경희씨는 여수에 시집온 지 30년이 됐어도 “서울댁”이라 불리는 데서 배척을 느낀다. 보람씨는 제주도민으로 산 지 20년이건만 결정적일 때 “육지 것”으로 분류됐다. 이웃에게 달려가는 마음을 10m 전에 멈추도록 붙든다.
결혼과 이민은 닮았다. 다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이 있는데, 가부장제에서 빗겨 난 결혼이거나 부부만의 결합이라는 인식이 없어야 한다. 둘 다 ‘나’의 가치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곳에서 시작한다. 남의 편에 둘러싸인 관계 속에서 투항을 요구받는데 그간 살아온 20~30년의 경험은 잊자고 회유한다. 출신국가의 경제력이 부모의 능력처럼 작동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결혼하러 왔다면 “돈 벌러 왔다” 소리를 듣고, 부자 나라에서 오면 글로벌 가족이라 불린다. ‘다문화가정’은 ‘무시’를 허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둘 다 지위 하락을 경험한다. 그리고 결승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그럼, 결혼과 이민이 합쳐진 상태란 어떠할까? ‘나를 잃어버리는 시간’이 강물처럼 놓여 있다. 건너가야 한다. 누구에게는 여울목일 수 있다.
혜정씨는 2007년부터 3년 동안 서울 구로동에서 ‘내 마음에 물주기’ 프로그램을 열었다. 극단 마실 대표로 이주여성과 소통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퍼 올리고 연극을 만드는 여정을 이끌었다. 연극이 끝나면 밀려오는 휘저어진 상념의 부유물이 다독여질 때까지 한 기수와 10개월씩 보냈다.
혜정씨에게는 잊히지 않는 두 참가자가 있다. 한명은 30대 중반 조선족으로 한달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다 그림으로 마음을 풀어내는 날, 그이의 도화지 위로 자전거 타고 골목을 달리는 여성이 등장했다. 고갯마루에 서 있던 자전거가 아래로 질주하듯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림 속 여성이 자신이고, 중국에서는 자전거로 골목골목을 누볐는데 구로에 와 살면서 나다니질 못한다고 했다. 한국어도 어눌해 50대 중반인 남편이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길을 한번 잃어버린 뒤에는 집 밖에서 문을 잠그고 출근할 정도였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한쪽 귀가 안 들린다고 고백했다.
나의 이민 초기엔 먼저 온 엄마들이 속상할 때 차 몰고 휘 나갔다 오면 마음이 뚫렸다는 말을 들었다. 운전을 남편에게 의존할 경우엔 정말 답답하다며, 운전면허부터 따야 한다고 충고했다.
마지막 리허설을 마치고 다들 부푼 마음으로 무대를 내려올 때였다. 그 조선족 여인이 소리쳤다. “귀가 뚫렸어요. 소리가 들려요.”
또 다른 여성은 40대 중반의 고려인이다. 아이들이 학교 간 시간에 제빵 보조를 하는데, 단 하루 쉬는 날을 연극에 쏟았다. 매주 혜정씨는 말문을 열 소재로 놀이나 이야기, 그림 등을 제시했는데 하루는 그분이 ‘다음 주에는 저희가 좋아하는 시를 가져와서 읽어요’라고 제안했다. 혜정씨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머, 문학을 전공하셨어요?” 이번엔 그분의 눈이 둥그레졌다. “시를 꼭 전공해야 읽나요? 누구나 쓰고 가까이하는 게 시 아니에요?” 다음 주, 그는 푸시킨의 시를 낭독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혜정씨의 귓불은 붉어진다.
이주민이 겪는 공통된 유형의 차별이 어린애 취급이다. 상대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지 않을 때는 자칫 선한 마음 사이로도 차별이 샐 수 있다. 무지로 인하여. 혜정씨는 구로에서 활동을 마치고 미국에 머물렀다. 낯선 땅에서 호감을 갖고 자신에게 귀엽다며 말 거는 서양인의 눈을 보며 ‘아! 이분은 지금 나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구나’를 느꼈다. 그날 혜정씨는 미안함에 사무쳐 펑펑 울었다. ‘지금 구로에서 활동한다면 그때의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가짐과는 정말 다르겠지, 회한이 일었다.
나는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미국에 살며 한국에 사는 결혼이주여성과 연대의식을 느껴왔다. 홍리씨를 연결해준 선배가 나를 소개하며 결혼이민으로 미국에 사는 후배라고 했더니, 대뜸 ‘저랑 같은 분이시네요’하며 반겼다고 했다. 어쩜 이리 나와 마음이 통할까 기뻤는데, 농촌에 사는 베트남 여성께 뵙기를 요청했을 때는 거북하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덜 가부장적인 사회인 데다 노동 압박도 적은 곳에 살면서 웬 동료의식이냐는 뉘앙스로 읽혔다. 언젠가 여성영화제에서 전문직 여성이 차별을 말할 때 ‘누릴 거 다 누리며 페미니즘을 말한다’고 비난했던 남성처럼,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질의 구조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시각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더 많은 실상을 접하고 나의 판단은 흔들렸다. 특히 농촌에 사는 이주여성에게 시댁의 압박은 심했다. 한국인 20, 30대 여성에게 요구하지 못할 가부장제 질서를 지우려 했다.
내가 접한 최악의 상황은 서울과 농촌의 20대 이주여성의 경우였다. 서울 여성은 60대 남편과 남편의 30대, 40대 아들 셋과 한집에서 살고 있다. 이주민 방문상담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며 전했다. 농촌 여성은 교사를 그만두고 왔는데 시어머니가 1년이 다 되도록 밤이면 30대 아들을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남편은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내는 소위 ‘정상가정’으로 보이고자 결혼시키고 자기는 외출을 못하게 막는 것 같다며 절망했다. 그는 동네 이주여성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사기’ ‘폭력’으로 불릴 행위가 벌어진다. 나는 범죄를 결혼으로 둔갑시켰기에 모든 인종의 결혼이주가 명백한 다문화 결속임에도 착시를 일으키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러다 나의 관념을 부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서 내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대표가 자신을 ‘언어가 같은 곳에 사는 이민자’라고 소개했다. 결혼해 지방에 살며 이민자의 어려움을 헤아릴 만큼 외떨어진 느낌이라고 고백하는 수사였다. 얼떨떨했다. 언어가 다른 곳에서의 삶이란 엄청난 차이일 텐데…. 나는 한국어에 한참 못 미치는 영어 때문에 날 멍청하게 보도록 상대에게 권한을 넘기는 것 같은 착잡함을 지금도 떨치기 어렵다. 나의 분투가 납작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바로 농촌에 사는 베트남 여성이 느꼈을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선하다 내세운 나의 의도, 곁에 있다고 주장했던 연대 선언에서 무언가를 흘렸다. 아마도 알지 못하며 안다고 생각했던 ‘무지’ 같다. 그렇게 타인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려 여기 적고자 골몰한다. 어리석음이다. 모른다는 것을 여태 붙들지 못하고 흘린다. 지금 허용된 말은 사과뿐일 텐데도.
그대로 따르는 대미 맹종의 태도도 버려야 한다. 어느 때보다도 오늘과 같은 전쟁과 국제질서 재편의 시대에 무조건적 대미 맹종은 바로 파멸의 길이다.
* 출처 : 한겨레신문
■ 안 희경 I 재미 저널리스트
2002년 미국으로 이주, 문명사적 성찰과 대안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인류 생존을 위한 10년 전략을 제시하는 대담집 ‘내일의 세계’, 세계 지성들과 코로나19의 원인과 미래를 탐색하는 ‘오늘부터의 세계’, 리베카 솔닛 등 세계 여성 지성들과의 대담 ‘어크로스 페미니즘’, 문명의 현재와 이를 만들어온 개인의 마음 운용 실체까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세계 지성 29인과의 대담 3부작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 ‘문명, 그 길을 묻다’, ‘사피엔스의 마음’, 현대미술 작가들과의 대담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이해인의 말’, ‘최재천의 공부’, 에세이 ‘나의 질문’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