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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처마 밑에도, 삼청동 돌담길과 광화문의 길고 긴 가로수 길에도 봄볕이 반들반들 반짝이는 계절. 연중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그 거리에 숨겨진 특별한 문화공간, ‘한국사찰음식문화체험관’의 주말은 더욱 바쁘다. 팬데믹의 종식과 함께 닫혔던 사람들의 문이 열리고, 오늘도 사찰음식(K-Temple food)을 찾아 이곳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 그리고 그 모두를 맞이하는 넉넉한 스님의 웃음이 있는 하루. 봄맞이 사찰음식 쿠킹클래스가 시작되는 날이다.
레시피 대신 붓다의 마음을 배워요
매주 토요일, 영어와 한국어로 동시에 진행되는 사찰음식 쿠킹클래스는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과 내국인 모두에게 언제나 인기 만점. 오늘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한국사찰음식문화체험관에서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성화 스님의 따뜻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네요. 기다리시는 동안 따뜻한 차 한잔하세요.”
한편에 마련해 놓은 구수한 차는 찻주전자 가득 넉넉히 담겨 있고, 어느새 차곡차곡 강의실을 채워 앉은 사람들. 독일과 대만, 필리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여러사람들이 강단의 스님을 바라보며 앉았다.
“흔히 사찰음식과 일반 채식이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찰음식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뜻대로 살아가는 수행자의 음식이지요. 생명존중 사상에 의해 육류를 섭취하지 않는 것은 같지만, 먼저 사찰음식은 수행 음식이기에 수행에 방해되는 5가지 채소를 사용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화 스님의 강연은 ‘사찰음식이란 무엇인가’를 전하는 것에서부터 그 시작이 있다. 수행자는 대중들과 한 방에서 함께 생활해야 하기에 냄새가 강한 향채를 멀리하고, 또 수행에 방해가 되는 과한 보양식도 최소화한다는 것, 대신 자연재료를 최대한 활용한 발효식품과 제철 식재료로 몸과 마음을 채우는 지혜. 오랜 시간 켜켜이 쌓아온 상생과 조화의 힘은 사찰음식의 가장 큰 정체성이다.
“우리가 방금 외운 오관게는 사찰음식의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 줍니다.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구절은 정말 물리적인 거리와 위치를 묻는 것이 아니예요(웃음). 이 음식이 내게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노고가 담겼는지 감사하고, 나의 가치를 되짚어 보는 기회를 뜻하는 것이지요.”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성화 스님은 한 줄 한 줄 오관게의 의미와 사찰음식의 의미를 전하며 끝으로 당부를 전한다.
“오늘 여러분의 그릇에 맛있는 음식 대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가세요. 그것이 오늘 수업의 목적입니다.”
한 그릇의 공동체
“오늘 모인 한 테이블이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사찰음식을 배우기 위해 모인 다양한 사람들. 남녀노소, 국적과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귀한 인연으로 작은 공동체를 이뤘다.
오늘의 메뉴는 ‘봄나물 콩죽’과 ‘냉이 두부조림’.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식재료로 봄의 맛을 내는 시간. 외국인들에게는 낯설고 새로운 식재료, 또 한국인에게는 더없이 친숙하지만 이는 사찰음식만의 독특한 향미로 또 한 번의 신선함을 전할 것이다.
“바야흐로 봄입니다. 새싹이 많이 올라오는 시기이지요. 이즈음의 콩죽과 비름나물은 아미노산이 많아 소화가 잘됩니다. 냉이는 한국의 봄을 대표하는 나물이지요. 향이 무척 좋아요. 하지만 이 모든 재료는 대체 가능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냉장고에 다른 재료가 있다면 그걸 활용할 수도 있어요.”
성화 스님의 조리 방법을 따라 저마다 열심히 재료를 손질하는 사람들. 어느새 물이 끓고, 기름이 데워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퍼져나가고, 음식이 만들어지는 만큼 각각의 테이블에선 웃음이 피어오른다.
성화 스님은 매번 강의 때마다 각 재료의 이야기와 이 음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 등을 전해주려 한다. 바로 이야기의 힘, 낯선 것을 친근하게 받아들이고, 맛이 없어 보이던 것도 맛이 있어지는 이야기의 신기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외국인 참가자들에게 처음 냉이를 보여 주면 대부분 이게 무슨 풀뿌리인가, 하는 표정입니다. 그냥 길가에 자라난 잡초 같은데 이걸로 무슨 요리를 한다는 거지? 하구요(웃음). 하지만 향이 좋지요? 하고 물어보면 그제야 냄새도 맡아보고, 웃으며 받아들이는 거죠. 또 봄나물들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식물인지, 건강에 어떻게 좋은지 알려주면 그렇게 애정이 생기고, 추억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레시피와 조금 달라도, 맛이 조금 없어도, 모양이 예쁘지 않아도 문제 될 것 없다. 다 함께 이날의 경험을 행복으로 떠올리고, 사찰음식의 정신을 오래도록 개인의 밥상에서 다시 꽃피우길 바랄 뿐.
어느새 각 테이블마다 한 상 차림이 완성되고, 고대하던 시식 시간!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이 마치 봄날의 파티를 연상시킨다. 낯선 식재료와 맛이 어색하기도 하련만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맛있게 즐기는 모습이다.
이번 쿠킹클래스에 참가한 매튜 숄츠 씨는 오늘로 벌써 두 번째 사찰음식 쿠킹클래스를 찾았다. 이날은 한국에 거주하는 매튜 씨의 추천으로 독일에서 여행을 온 가족들까지 함께 동참한 참이다.
“독일에 있을 때 한국 사찰음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때 이곳을 알게 되었지요. 2주 전에 처음 쿠킹클래스를 접해보고 오늘 또 오게 되었는데, 먹을수록 맛있어요.”
함께한 가족 펠릭스 씨도 상기된 표정으로 소감을 전한다. “아내가 채식주의자예요. 다양한 채식요리를 집에서 만들어 보곤 하죠. 한국 요리책도 찾아보고요. 하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예요. 정말 맛있어요.”
저마다 사찰음식과 함께 추억을 만드는 시간, 성화 스님은 그들의 시간에 마지막 당부 한마디를 보탠다.
“오늘 드신 음식의 맛도, 레시피도 잊을 수 있어요. 하지만 사찰음식은 부처님의 음식, 부처님의 마음으로 먹는 음식이라는 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찰음식, 이야기를 맛으로 전하다
“참 신기하죠? 처음 강의를 맡을 땐 외국인들이 낯선 음식이라 잘 먹지 못할까 걱정도 했어요. 하지만 이미 식재료를 배우고, 본인이 직접 음식을 만든 이상 사찰음식은 저분들에게 낯선 요리가 아니에요. 그게 중요한 거죠.”
성화 스님에게 요리는 이야기다. 그래서 스님에게 사찰음식은 더욱 미묘하고 아름답다. 마치 하나의 음식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처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행자들이 한데 어울려 만드는 그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며, 조화로운 한 그릇의 산물.
“사찰음식을 공부하며, 또 강원에서 공부할 때 보니 스님마다 각자 음식과 관련된 특별한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를 한데 모으거나, 연재하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요. 강원이라는 곳이 전국팔도에 있는 스님들이 다 모여서 생활하다 보니 음식을 참 많이 배웁니다. 충청도에서 태어나도 경상도에서 출가하면 또 새로운 걸 배우고, 어느 강원을 가는지, 어떤 도반들을 만나는지에 따라 또 달라지고요. 아주 오래전 같으면 북한에서 오신 스님들께 전수된 메뉴들도 꽤 됐겠지요. 그런 것들이 구술되어 내려오는 것이 사찰음식이잖아요. 어찌 보면 지역색이 가장 흐린, 섞이고 섞인 우리네 음식이 사찰음식 아닐까 싶어요. 그렇게 만들어진 레시피와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귀하게 느껴집니다.”
스님에게도 그렇게 보물 같은 이야기로 남겨진 음식이 있다. ‘무왁저지’라고 불리는 무조림이 바로 그것 전라도에서는 왁대기라고도 불리는 이 요리는 주로 겨울철에 큼직하게 썬 무를 들기름에 볶아 양념과 함께 채수를 부어 뭉근하게 끓여 완성한다.
보현암에서 행자를 살던 시절, 난생처음 먹어본 추운 겨울의 따뜻한 무조림 맛이 어찌나 좋던지, 입안에서 사르르 녹던 그 달큰한 맛을 잊지 못해 원주스님에게 달려가 이 맛을 어떻게 내냐고 물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찬바람 불면 생각나고, 나에게 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사찰 음식을 생각하면 저는 그 무왁저지가 생각나요.” 미소짓는 스님에게 사찰음식은 매일의 친구, 공부, 그리고 신념인지도 모른다.
“약간 우스갯소리 같긴 한데, 저는 가스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있어요(웃음). 오래전 저희 노스님을 모실 때 항상 그렇게 가르쳐 주셨거든요. 물을 끓일 땐 반드시 뚜껑을 덮어라! 뚜껑을 열고 물을 끓이면 가마솥 데우느라 나무가 많이 들어간다, 또 삶거나 데칠 때 뚜껑을 덮지 않으면 가스 많이 들어간다, 하시면서요. 뚜껑 닫는 걸 깜빡해서 노스님께 등짝도 참 많이 맞았어요(웃음).”
그저 자원이 낭비되어 그런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스님의 그 가르침은 지금도 스님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성화 스님이 강의를 할 때마다 언제나 빼놓지 않는다는 한마디.
“음식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아가세요.”
켜켜이 모아둔 마음들과 굽이굽이 쌓이는 이야기가 한 그릇의 음식이 되고, 가르침이 되는 시간. 성화 스님과 함께 한 봄날의 사찰음식은 그렇게 꽃으로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