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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합천 황강. 사진 합천군청 누리집
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곳
영남지방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경남에서 가장 긴 강은 남강과 황강이다. 남강은 진주 촉석루를 품으면서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 전투와 논개 스토리를 남겼다.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거창 수승대 앞을 지나 합천댐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합천 읍내를 휘감아 흐른다. 모래톱이 아름다운 강변 맞은 편 절벽의 대야성(大耶城)과 연호사(烟湖寺) 그리고 함벽루(涵碧樓)에는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대야성 전투는 삼국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가 황강을 국경선 삼아 대치하던 군사요충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몇 천명이 전사하고 1천명의 포로가 나올만큼 당시로서는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대야주 도독 부인은 뒷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 603~661)의 딸 고타소(古陀炤)였다. 김춘추의 딸은 남편인 김품석과 함께 그 전투에서 산화(散花)했다. 서라벌에 있던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하루종일 기둥에 기댄 채로 서 있었으며 그 앞을 다른 가족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 황소와 농부. 사진 영화 <워낭소리>
전사자 영혼의 명복을 빌고 또 지역사회에 남은 가족과 주민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세워졌다. 대야성과 강물로 이어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황우산(黃牛山)이다. 황우는 부처님의 성씨인 ‘고타마’에서 왔을 것이다. 인도말 고타마는 ‘훌륭한 소’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옮기면 그대로 황우(黃牛)가 된다. 전쟁 후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정화하여 맑은 물로 바꾸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창건주 와우(臥牛)대사 법명도 그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지가 된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 曹植 1501~1572) 선생은 그런 황강의 역사를 시로 남겼다.
길가 풀은 이름없이 죽어가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은 제멋대로 일어난다(山雲恣意生)
강은 무한의 한(恨)을 흘러 보내며(江流無限恨)
돌과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나(不與石頭爭)
▲ 황강의 합벽루. 사진 합천군청 누리집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강물은 맑음을 되찾았고 산과 들은 본래 모습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煙) 한낮에는 햇볕에 반짝이는 흰 모래밭 너머 정양호(湖)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자랑하는 연호사(烟湖寺) 동쪽 곁에 새로운 누각이 ‘절처럼’ 들어왔다. 함벽루(涵碧樓)는 1321년(고려 충숙왕 8년) 합주(陜州)의 행정책임자(知州事 군수)인 김영돈(金永暾 1285~1348)이 건립했다. 함벽(涵碧)은 ‘푸른 빛으로 적신다’는 뜻이다. 이름이 주는 낭만적 분위기와 달리 현실은 물가에 있는 나무로 만든 집인지라 습기와 홍수 때문에 연호사와 더불어 수차례에 걸쳐 수리에 수리를 거듭한지라 오늘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현재의 건물은 ‘함벽루 기(記)’에 의하면 1680년 합천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창한 것이다. 동시에 연호사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함벽루가 너무 퇴락하여 중수코자 하였으나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그 고민이 밤낮으로 끊어지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 해 여름홍수에 뜻밖에 기둥과 대들보가 될 만한 재목 100여개가 떠내려 왔다. 못을 주조할 수 있는 쇳가루도 모래톱에 함께 쌓였다. 범람한 물은 사금은 아니지만 꼭 필요했던 사철(沙鐵)까지 가져 온 셈이다. 홍수는 집을 떠내려 가게도 하지만 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싣고 오기도 하는 두 얼굴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은 이를 두고서 ‘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했다. 남은 재목과 여력으로 함벽루 서편 연호사까지 중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불가의 사찰과 유림의 누각은 다시금 조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 황강가 함벽루. 사진 합천군청 누리집
함벽루는 대야산성 절벽 강기슭에 위치하며 황강과 늪지인 정양호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때문에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다. 전국의 많은 누각이 있지만 추녀 끝의 낙숫물이 바로 강물로 떨어지는 곳은 남한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리를 듣고자 비오는 날이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뒷날 강물의 흐름이 다소 바뀌고 떠내려간 축대를 거듭 쌓으면서도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중수할 때마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지키고자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앞면 3칸 측면 2칸 대들보 5량인 별로 크지도 않는 넓이의 누각 안에 빼곡이 걸려 있는 현판들이 하도 많은지라 하나하나 세어보니 족히 스무개가 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없이 내걸리고 또 수없이 내려지면서 교체에 교체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 남은 것이 이 정도이니 가히 누각의 명성과 주변 경관의 뛰어남을 짐작할 만하다.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 선생 글도 보인다. 지역선비들도 질세라 이름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시월의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연호사를 찾았다. 대야성 연호사 함벽루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대야(신라) 합주(고려) 합천(조선)으로 지명도 함께 이어졌다. 도량 인근에는 지역유지들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을 모은 ‘비림’과 함께 합천 이씨 재실인 ‘공암정(孔巖亭)’ 그리고 ‘황벽루보존유림계’와 ‘대동계’ 비석, 강석정 시인의 황강시비, 활터인 죽죽정, 대야성 전투 때 활약한 충신 죽죽(竹竹)의 비각 등이 거리를 두고서 자리를 잡았다. 지자체와 지역주민 그리고 사찰이 함께 힘을 합해 가꾸는 살아있는 역사문화지구의 현장이라 하겠다. 사족을 보탠다면 합천군수를 지낸 강석정 시인은 ‘연호사지(烟湖寺誌)’(조계종출판사 2017)저자이며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은 합천 이씨가문 출신이다.
▲ 황강가 연호사. 사진 합천군청 누리집
연호사에는 강원(講院)에서 함께 공부했던 도반 J스님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함벽루 동편에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을 지으면서 비로소 사격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안심당(安心堂)에서 차를 나누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80년대 연호사는 1박2일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1년에 한두 번 정도 지역의 학인승려들이 와서 하룻밤 묵던 곳이다. 어느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얕아진 강물에 바지를 걷어올리고서 건넛편 군부대 훈련장까지 걸어갔던 기억 등을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 새 지난 일을 추억하는 구시대의 인물이 되었다는 말에 또 웃었다.
■ 글 원철 스님(불교문화연구소장)
* 출처 :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