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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아닌 연두, 빨강이 아닌 분홍. 봄의 빛깔은 절정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는 과정의 빛이다.
이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공주이고 특히 그 중심에는 예로부터 봄에 더욱 아름답다고 하는 마곡사가 있다.
이곳에 누구보다 성실하게 인생의 봄을 살고있는 두 사람이 찾았다.
“와, 예쁘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
서울에서 공주에 진입하자 차창 밖의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조금씩 농도를 달리한 연둣빛 융단을 깐 듯한 산을 배경으로 연분홍 벚꽃비가 쏟아졌다. 몽골에서 유학 온 하루는 그 풍경을 보며 예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예쁘네. 오늘도 어제만큼 아니 오늘은 더 예뻐졌네.” 하며 노래를 부르자 곁에 있던 셰이마도 자연스럽게 같이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이 반복하는 ‘예쁘다!’는 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봄은 무르익은 듯한 ‘아름답다’는 표현보다는 작고 여리지만 그래서 마음이 가는 ‘예쁘다’는 말이 꼭 맞는 옷 같았다.
튀르키예에서 서강대로 유학 온 셰이마(Oz Seyma)는 정치외교학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관광을 전공하고 있는 경희대 3학년생 하루(몽골 이름은 Tumur Ariunbayar)와는 2년 전 평창 드림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동계 스포츠를 즐기기 어려운 기후대의 나라 청소년들을 초대해 다양한 겨울 스포츠와 K팝, 커버댄스 등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하루는 진행요원이었고 셰이마는 참가자였다고한다. 그렇게 친구가 된 셰이마를 하루는 ‘바빠도 시간을 내서 만나는 친구’라고 했고 셰이마는 ‘새로운 생각과 시선을 가르쳐주는 친구’라고했다.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 길에서
1,500여 년 전, 공주는 고대국가 백제의 수도였고 공산성은 백제를 지킨 대표적인 성곽이었다. 먼 옛날 삼엄한 경계와 긴장의 현장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휴식과 충전의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눈부신 파란 하늘 뭉게구름 아래 펼쳐진 산성은 능선과 계곡을 따라 자연스런 곡선미를 자아내는데 높이 110m, 둘레 2,450m의 산성길을 따라 걷는 두 친구는 자연과 동화된 듯 풍경과 어우러졌다.
산성길 산책을 마치고 무령왕릉과 왕릉원을 찾았다. 무덤 주인의 신분이 밝혀진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인 무령왕릉과 백제의 왕족묘로 이루어진 왕릉원은 포근한 느낌을 주는 주변의 산세를 닮아있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안온한 기운을 전해준다. 기념관에 재현된 무령왕릉 안에 들어간 두 사람은 무덤 벽돌에 양각된연꽃무늬에 눈길이 간다고 했다. 하루는 “몽골의 국화가 연꽃이에요. 신기하네요. 백제시대에 연꽃이 사랑을 많이 받았나 봐요.”라고 했다. 불교국가였던 백제에서 ‘진흙 속에 살아도 그것에 더럽혀지지 않고 맑게 피어나는 연꽃’은 불교의 가치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하자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비롯해 주위 자연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게 조성된 무덤양식에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곧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인의 미의식이 담겨있고 이는 조선시대 궁궐양식에도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소개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은한 백제인의 미소를 지었다.
마곡사에서 만나는 봄
예로부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온다.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뜻으로 봄 마곡사의 수려함을 일컫는다. 마곡사의 초입부터 물결치는 신록과 봄꽃의 향연이 마곡사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극락교 아래를 흐르는 마곡천에는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부처님오신날을 위해 띄워놓은 색색의 연등이 눈길을 머물게 했고 주위의 벚꽃, 진달래꽃, 개복숭아꽃 등과 어울리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4월의 첫 주말, 봄의 마곡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전국에서 온 17명의 사람들과 템플스테이의 첫날을 시작했다. 마곡사에서 막연히 ‘편안하다,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는 참가자들에게 아는 만큼 보이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안내해준 분은 마곡사템플스테이 지도법사 묘주 스님이었다. 스님은 범종루에 있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사물의 의미와 기능을 비롯해 전과 각, 당의 차이와 오층석탑, 영산전, 대웅보전, 대광보전 등 마곡사의 보물을 소개해주셨고 백범 김구 선생의 자취를 보여주셨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한 뼘쯤 자란 안목으로 눈부신 채도의 햇살이 속속들이 비치는 마곡사의 경내를 산책하는 기쁨이 자못 컸다.
저녁이 되자 예불에 참석하고 한 사람씩 타종체험을 했다. 셰이마는 이 그윽한 소리가 뭇 생명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은은하게 잦아드는 범종소리 끝에 들려오는 계곡물소리, 바람소리,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마음에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켰다. 마곡사에 머물렀던 김구 선생은 그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타종으로 시작하는 저녁 예불소리를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 같이 들렸다.”라고 기록했다.
저녁이 깊어지는 시간, 요가가 펼쳐졌다.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자 굳어있던 마음마저 부드러워지고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요가가 무척 즐거웠다며 하루는 선생님의 동작을 따라하는 데 자기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났고 즐거움을 감출수 없었다고 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세요!
온돌방사에서 맞은 다음날 아침은 특별했다. 따스한 방의 온기를 간직한 채 반투명 한지 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는 느낌이 좋았고 산새들의 생기 가득한 노랫소리에 귀를 열어두고 짧은 시간이나마 참선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았다.
마곡사의 아침은 명상길이 있어서 더욱 좋다. 5층석탑 옆 백범당에서 출발해 김구 선생 삭발터, 토굴암, 군왕대를 지나 마곡사로 돌아오는 3km 코스를 비롯해 백련암, 활인봉, 생골마을을 경유하는 2코스의 백범길과 은적암, 아들바위, 나발봉, 다비식장 등을 지나는 3코스의 송림숲길이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유치원생 손자까지 포함한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은 비교적 쉬운 코스인 1코스를 함께 걸으며 군왕대의 기운을 느껴보고 침엽수림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도 폐부 깊숙이 호흡했다.
명상길 걷기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식혀준 건 묘주 스님과 함께한 차담시간이었다. 스님께서 만들어주신 은은한 보이차를 마시고 약과의 달콤함을 맛보며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수행자의 사찰생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참가자들의 긴장이 풀어졌다고 느끼신걸까? 이윽고 스님께서 “궁금한 거 있어요?”라고 물으셨다. “우울하고 힘들 때 스님은 어떻게 하세요?” 하루의 질문이었다. 스님은 “그것은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에요. 그 마음을 외면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알아차리고 바라봅니다. 누구나 느끼는 우울한 감정, 부처님께서는 그 첫 번째 화살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고 하셨어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화살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지요. 더 큰 악의 고리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 번째 화살을 기억하세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화살의 지혜를 기억의 창고에 넣으려는 듯 하루와 셰이마를 비롯한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스님의 마지막 조언도 일상을 발전으로 이끄는 나침반 같았다. 나의 상황과 내 곁의 사람은 내가 만든 인연의 결과라는 것, 하여 선한 인연을 맺어야 하며 선한 인연이란 선한 씨앗을 심는 것이며 그것은 나의 선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나의 소중한 세 가지 씨앗
하루와 셰이마의 오늘을 이끈 선한 씨앗,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는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상기된 목소리로 셰이마가 먼저 이야기했다.
“저는 깊은 대화, 운동, 음악이에요. 깊은 대화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이죠. 타인뿐만 아니라 저 스스로와 나누는 깊은 대화도 포함돼요. 자신과 대화를 나눌 때 나를 잘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제 고국 튀르키예는 운명적인 것이지만 한국은 온전히 제 선택에 의해 온 곳이에요. 그래서 각별하죠. 음악은 제겐 또 다른 삶의 기록, 그러니까 일기 같은 거예요. 한국어를 배울 때도 노래를 배우고 가사를 이해하면서 공부했지요. 운동은 제 자신감의 원천이고요. 꾸준히 운동을 하면 체력도 길러지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올라요.”
“저는 먼저 가족이에요. 특히 우리 엄마. 좋은 곳에 가거나 음식을 먹을 때 제가 사랑하는 엄마와 가족을 생각하게 돼요.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거든요. 두 번째 제게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 마음가짐이에요.
어려워 보이는 일도 긍정적인 태도로 임하면 가능성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죠. 마지막으로 저는 능력을 꼽고 싶어요. 저는 능력이 저를 성장시킨다고 생각해요. 제가 몽골에서 경희대를 선택해서 온 것도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루의 이야기가 끝나자 셰이마의 얼굴에 공감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틀간의 템플스테이 중 동심으로 돌아가 장난기 가득했던 두 사람은 인생과 꿈에 대한 이야기도 기탄없이 나눌 수 있는 친구라고 했다. 두 친구는 열심히 공부를 하는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국 문화를 배울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점도 닮은 친구이기도 하다. 일요일 오후,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돌아온 두 친구는 곧 다가올 시험과 동아리 활동을 위해 바삐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여 있지 않고 움직이는 성장의 봄, 두 청춘의 뒷모습이 연둣빛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