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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증심사 요가 템플스테이
봄날 같은 겨울날 무등산에 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누가 나인가
나무 아래 서 있는데
새들이 잎과 가지를 쪼아 떨어뜨리며
나를 내쫓는다
미안하다 거기 서 있어서
작고 여리고 힘없는 존재들에게
미안하다
또르르 말린 나뭇잎이 악착같아 보여서 일부러 넘어져 무릎이라도 깨뜨리고 싶은 계절이다. 나의 슬픔 따위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이 속절없어 한탄하게 되는 계절이다. 바닥에 뒹구는 헤아릴 수 없는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한꺼번에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와 이곳이 생지옥인가, 고개를 가로젓게 되는 계절이다.
해탈하기 딱 좋은 날
겨울에 든 무등산의 햇살이 무척이나 따사롭던 반전의 날, 증심사 템플스테이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하기로 해놓고 터무니없이 용산으로 간 까닭은 돌아오는 날 알았다. 길을 걷는 것처럼 삶도 끄트머리에 가서야 겨우 하나쯤 터득하게 된다. ‘미리 알면 재미가 없잖아.’ 마음의 귀에 속삭이는 당신의 목소리가 그날따라 어찌나 얄밉던지. 심장 있는 곳 어디쯤에서 불끈 솟아오르는 못된 열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역방향으로 앉은 기차의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제야 가만히 눈에 들어온다. 다가오는 것들보다, 멀어지는 것들이 주는 아스라한 편안함을 이제야 제법 알아차리는 계절이다.
“요가의 목적은 해탈입니다.”
해탈.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신선하기도 했고, 낡은 옷처럼 누추하기도 한 이 ‘해탈’이라는 진동을 일으킨 이는 증심사 ‘요가가 있는 템플스테이’를 지도하는 이진재 선생님이다. 수많은 서랍들 중에 어디다 두었는지 잊고 있던, 뽀얗게 먼지 쌓여 있던 돌 하나가 그 진동에 갑자기 움찔하고 반짝였다.
화를 다스리고,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고 균형을 되찾고, 건강하고 맑은 정신을 갖게 하는 요가의 알려진 이점보다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지를 나직한 음성으로 일러주면서 증심사의 아주 특별한 템플스테이는 시작되었다.
아파도 조금만 아프기를
평소에 늘 하는 몸의 움직임과 반대로 상체의 앞면을 열어서 뒤쪽으로 젖히는 후굴자세 몇 동작과 온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척추를 세워 신체의 순환을 도와주는 태양경배자세 등 기본적인 요가 동작으로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어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요가 수행에 집중해 들어갔다. 증심사 취백루에 모여 동작 하나, 힘줄 하나에 숨을 밀어 넣는 그 날의 동지들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고 대견했다. 마침내 사바아사나(savasana, 송장자세), 완전한 휴식이며 목적지이자 마침표인 죽음의 예행연습이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 요가 시간이 끝나고 지도법사 혜공 스님의 친절하고 깊이 있는 안내에 따라 증심사 곳곳의 설명을 들었다.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증심사 경내의 느낌은 단정하고 강건했다. 마치 커다란 시련을 겪고 나서 말수가 줄어든 사람처럼 묵묵하고 자애로웠다. 대웅전 뒤에 모셔진 오백나한전과 세 개의 탑, 특이한 구조의 산신각과 뒤돌아 선 듯한 석조보살입상 등 자세히 볼수록 사려 깊고 기품 있는 모습이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가 없었다.
증심사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찰을 만날 때마다 절은 잘 표현된 경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한전 옆 초록 이끼가 낀 소담한 두 개의 탑 사이에 탑처럼 서서 가까이 아픈 사람들의 쾌유와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아픔 없는 곳으로 가셔서 그대로 해탈하시길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길, 그리고 아파도 조금만 아프시길….
촛불 속의 불꽃을 보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요가를 시작했고 인도 전통 요가 학교인 비하르 대학에서 수학한 이진재 선생님의 두 번째 강의는 어둑 해지는 겨울 저녁처럼 점점 깊어져 갔다. 인도 철학과 불교 사상의 오랜 근원을 연결해 설명하는 요가 수행과 명상의 원리들이 사뭇 진지하고 심도 있었다. 또박또박 하고 흔들림 없는 속도와 음성의 파동에 심장 차크라(아나하타 차크라, anahata chakra, 에너지)가 진동되는 것을 느꼈다.
아나하타는 사랑과 연민 자애와 더불어 기쁨과 평온을 관장하는 사무량심의 거처로 수행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차크라이다.
“흔들리는 촛불을 보지 말고 움직이지 않는 심지에 집중하세요!”
저녁 요가 수업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는 촛불 명상이었다. 마음을 조절하여 흩어지지 않게 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게 집중시키는 명상의 입문으로 촛불이 가장 편리하고 효과적인 대상이라는 설명이다. 10여 명의 참가자들은 촛불을 가운데 두고 짝을 지어 앉았다. 취백루의 조도를 낮춘 상태에서 우리들은 촛불이 아니라 심지에 집중한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호흡했다. 눈을 감았을 때 보이는 촛불의 환영이 사라질 때까지 집중했다가, 다시 눈을 떠 흔들리는 촛불 가운데 굳건히 빛나는 심지 끝 작은 불꽃을 보았다. 그것이 아상을 벗어난 참나의 자리라는 것을 누구라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나의 상칼파를 찾아서
밤은 요가 수업처럼 깊어 갔고 이제 마지막 요가 니드라(Yoga Nidra) 차례다. 요가와 잠을 뜻하는 니드라가 결합된 이 수행법은 의식을 확장시켜 그 한계로부터 해탈시키기 위해 특정한 행법을 사용하는 인도의 수행 전통인 탄트라(tantra)에서 유래했다. 잠 없는 잠, 동적인 수면 상태를 뜻하는 요가 니드라는 완전한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이완을 유도하는 체계적인 방법이다. 우리들은 사바아사나 자세에서 눈을 감고 이진재 선생님의 메트로놈 같은 음성을 좇아 심령적인 수면 상태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자는 것 같은 깨어 있는 것 같은, 잠과 깸이 밀당하는 사이에 선생님이 미리 숙지시켰던 상칼파(sankalpa)를 두 번 소리 내어 암송하게 된다. ‘상칼파’란 산스크리트어로 나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주는 결심, 소망, 선언을 뜻한다. 어떤 이에게는 헤어질 결심이, 어떤 이에게는 취업과 합격이, 또 어떤 이에게는 금연이나 건강이겠고, 어떤 이에게는 해탈이나 평화로운 죽음일 수도 있는 상칼파. 순간 나의 상칼파를 찾으려고 이번 증심사 템플스테이에 온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애초에 적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어쩌다 서로에게 죽고 죽이는 상황에 처해져 누군가가 누군가를 눌러 죽이는 생지옥. 총도 칼도 없이 꽃도 없이 스러진 원혼들의 영가천도를 빕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달려가서 손 내밀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또한 빕니다.’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
다음날 캄캄한 하늘에는 별도 달도 찬란했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대웅전에 누워 혜공 스님의 안내에 따라 자비명상과 나를 위로하는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온몸을 정화시켜 주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증심사 주지 중현 스님과의 차담 시간도 잊을 수 없다. 어쩌다 스님이 되었다며 절 생활이 뜻밖에 잘 맞았다고 느릿느릿하고 담백한 말씀이 인상 깊었다. 어쩌다 태어나서 어쩌다 어른이 되어서 어쩌다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는 어쩌다 인생들.
템플스테이는 문이다. 어쩌다 오게 된 절에서 더 깊은 성찰과 수행, 불성(佛性)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나를 찾고 세상을 진심으로 연민하며, 마침내 해탈에 이르는 아름다운 여행이 되기를…. 이것이 나의 또 하나의 상칼파였다.
돌아오는 기차의 목적지를 서울역으로 끊어놓고 아뿔사, 용산역에서 또다시 잘못 내렸다. 두 번의 연속된 같은 우연은 어쩌면 필연인가. 역에서 나오는데 가까이에서 군중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꿈결인가, 아직 요가 니드라가 끝나지 않은 것일까? 의심도 잠깐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의 가두행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 온통 ‘용산’이 화두처럼 들어앉아 있었던 거구나.
고통이 없으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없다. 우리는 슬픔을 딛고 슬픔에서 벗어나야 하는 존재다. 봄날 같은 겨울날, 어서 다시 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제공: 한국불교문화사업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