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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한 살, 두 살 더 먹어갈수록 건강에 대한 염려가 조금씩 커집니다. 병원에 들르는 횟수도 많아지고 예전 같으면 그냥 물음표 하나 찍고 지나쳤을 증상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유튜브 즐겨찾기에는 건강관련 채널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어떻게 살아야 더 오랫동안 건강한 삶을 누릴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갖가지 정보를 찾아보기도 합니다.
얼마전 어느 방송 프로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인들이 경험하는 건강상의 문제들 중 대부분이 맵고 뜨거운 국물에서 비롯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뜨끈한 국물은 몇 가지 염류와 지방성분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양분을 함유하지 않기에 국물의 영양가치는 사실 거의 전무하며 뜨거운 온도탓에 식도에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면서 모든 국물 애호가들의 ‘잘못 살아온 반 평생’을 질타하는 내용이었지요.
하지만 뜨끈한 국물의 가치는, 특히나 요즘처럼 냉냉한 날씨에 손발이 오글아붙고 얼어붙은 경제한파에 마음이 졸아붙는 시절에는, 단지 그 안에 섞여있는 화학적 성분에 의해서만 단정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물질이 아닌 것들에 의해 온전한 물질인 국물의 의미가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아침을 지내오며 이젠 ‘기상’이라는 행동에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포근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아직도 낯설고 억지스럽습니다. 팔, 다리, 등, 어깨.. 사지육신의 모든 근육이 뻐근하게 뭉쳐버린것만 같고 밤새 매 말라있던 식도와 위장도 뻣뻣하게 굳어서 마치 가죽허리띠를 입에 문 듯 합니다.
질질 발을 끌며 지척지척 걸어가 앉은 식탁위로 아내가 끓여내 온 콩나물 국밥 한 그릇..
뚝배기에서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밥에 새우젓 한 젓가락 툭 털어넣은 후 얼큰한 다대기 잘 헤집어 골고루 풀고 덜 익은 계란 노른자를 꼭 집어 터뜨려서는 뜨겁고 진한 국물을 농밀한 수증기와 함께 후르륵 넘깁니다. 밤 새 굳어있던 식도와 위장을 타고 흐르며, 안에서 밖으로 넘쳐흐르는 열기의 전율을 실감케 하는 한 숟가락의 뜨거운 국물.. 메말라 있던 비강을 타고 역류하며 매콤한 수증기의 행복한 알싸함을 선사하는 뜨거운 증기.. 목울대를 꿀렁이며 타고 넘는 국물의 역동은 싣고가는 영양성분의 유무가 아닌 제 뜨거운 몸의 열기로 인해 가치가 있습니다. 식도를 지나며 심장을 덥히고 위장에 다다른 후엔 폐부로 번져 나가는 따뜻한 온기는 하루를 시작하는 삶의 풍요로움이요 물질이 선사하는 물질 아닌 선물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 표 두개쯤은 달아놓아야 할 만큼 의미심장한 사건들도 있고 달력에 체크해가며 기억해야 할만큼 중요한 기념일들도 있습니다. 무조건 성공해야만 하는 프로젝트도 있고 통과하지 못하면 인생이 대략 난감해지는 시험도 있습니다. 음식에 포함되어 피가되고 살이되는 영양소처럼 이 모든 중요한 단계와 과정과 내용들은 인생의 뼈대위에 차곡차곡 쌓여나가 삶을 풍성하게 하고 유익하게하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장보다는 내용에 집중해야하고 느낌보다는 실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배워왔고 또한 가르쳐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받은 이들에게 기대되는것은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알짜배기인 그 무엇을 찾아내고, 분석하고, 정의하고, 암기하고, 적용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공부’라 불렀고 공부를 통해 정신속에 쌓여지는 알짜배기인 그 무엇을 ‘지식’이라 불렀습니다. 인류역사를 통해 지식은 세대를 거듭하며 점점 더 확실해졌고 정교해 졌습니다. 애매하기만 하던 사회구성원간의 관계들이 법령에 의해 규정되었고 매년 ‘살구꽃이 피일무렵’이던 파종시기는 달력에 의해 명료해졌습니다. 소리로만 남아있던 노래, 전설, 교훈들이 종이위의 기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고 무언지모를 힘에 의해 벌어지던 온갖 자연현상들이 숫자와 기호와 계산을 통해 설명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지식계발을 근간으로한 물질문명의 발전을 통해 오늘을 이루었고 또 내일을 꿈꿉니다. 물질은 자연계를 구성하는 기본재료이고 바탕이며 그 양과 질과 가치와 흐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우주의 구성요소중 하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물질을 바탕으로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물질의 풍요를 위해 문명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목적이고 서로가 동기인 물질과 문명은 지식을 통해 연결되고 형상화되고 구체화됩니다. 바로 여기에 지식의 가치가 있고 공부의 이유가 있습니다.
물질과 문명을 연결하는 지식.
역사 이래 단 한순간도 평가절하된적이 없었고 폄하된적이 없었던 가치인 지식.
이 지식의 숭고함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최근 몇 년동안 일어났고 이제 우리는 지식이 가치를 잃은 새로운 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두들 들어서 아시고, 기대하시고, 또한 염려하시는 인공지능의 실용화가 그것입니다. 사실, 사회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한 개인에게 있어서 지식의 가치는 그 활용의 무궁무진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을 습득하는 과정의 지난함에 달려 있습니다. 힘들게 땀 흘려 벌어들인 돈이 로또맞아 벌어들인 일확천금보다 가치있다고 말하듯, 힘들게 발견해낸 생활속의 깨달음이 손쉽게 주워들은 명사들의 격언보다 가치있는 법입니다. 물론 그 객관적인 값어치야 훨씬 헐할수 있겠습니다만...
2023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공지능은 연구의 대상이며 동시에 걱정거리입니다. 인류멸망의 선봉이 될 것이라는 우려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동시에 업고 있는 현대 물질문명의 기린아요 인류가 보유한 지식의 총아입니다.
인공지능의 가능성이자 위험요소는 단 한가지 입니다. 그것은 바로 학습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공부이지요. 인간이 물질에 덧붙여 문명을 일으켜 세웠던 원동력이었던 지식, 그리고 그 지식을 손에 넣게하는 가장 확실하고도 정직한 방법인 공부. 인공지능은 이 공부를 통해 스스로의 지식을 발전시킵니다. 지난 수천년간 인간의 전유물이었고 인간의 한계였던 공부를 이제는 인공지능이 대신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결과만을 꼬치에서 단감 빼먹듯 쏙쏙 빼먹고 있습니다. 이에따라 인간이 공부를 위해 들여야 할 시간과 노력은 반감되었고 상대적으로 취득하게 되는 지식의 질은 상향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가지는 값어치는 높아졌지만 그 가치는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위한 노력이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현대 지식사회에서 값어치와 가치는 인공지능에 의해 상충되고 맙니다.
요즘 학생들은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붙들고 앉아서 낑낑대지만 그 문제를 풀어냄으로서 습득하게 될 지식의 가치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듯 합니다. 아마 조만간 지식의 시대가 막을 내릴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듯 합니다. 지금 애써서 공부한 모든 지식이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는 머리에 심긴 인공지능 칩에 의해 순식간에 습득되는 날이 올거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공부에 대한 열의가 식습니다. 가치가 아닌 값어치에 집중하는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이러한 타의적 게으름은 명분을 갖습니다. 세상의 조류에 합류한다는 당위성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현대 인류문명의 기반이 되어온 지식과 그것을 확보하는 과정인 공부에는 지금까지 열거해 온 레고블럭같은 구성요소만 존재했던것은 아닙니다. 무미건조하게 직각을 세운 블럭들을 끼워맞춰 현대문명를 이룩한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거기에는 실질적인 발전을 재촉하는 양분과도 같은 지식과 함께 염분과 지방을 빼면 별로 남는것도 없는 뜨끈한 국물과도 같은 요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성’입니다.
인간의 객관적가치를 가름하는 몇 가지의 기준이 있다 합니다. 그 중 신체적인 조건을 빼고 정신적인 부분만 남기면 지능과 지식, 그리고 지성의 세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지능은 가장 원초적이고도 근본적인 기준으로서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전자에 의해 80%정도 결정이 되고 그 나머지는 유아기의 경험이나 학습, 양육방법등에 따라 달라진다 합니다. 두번째 기준인 지식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학습에 의해 계발되고 적절한 지도와 노력의 결과로 얻게되는 가치입니다.
그런데 세번째 기준인 지성은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와는 사뭇 다릅니다. 지능이 지식이 담길 그릇의 크기를 말하고 지식이 그 그릇을 채우는 실질적인 정보의 양과 질을 말한다면 지성은 두뇌의 명민함과 올바른 양심이 만나 공공의 선과 유익을 향해 일으키는 시너지와도 같은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지식인은 많지만 지성인은 적다고 말합니다. 지성인은 당연히 지식인이지만 지식인이 모두 지성인인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콧수염과 나비넥타이가 멋드려졌던 고 김동길 교수께서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향해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이 되라고 촉구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지성인을 지식인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지식위에 더해져서 그것을 지성으로 탈바꿈 시키는 ‘그 무엇’을 지향하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일까요? 혹시나 거기에 우리 아이들이 인공지능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아나갈 비밀이 숨어 있는것은 아닐까요? 모든 지식의 가치가 하락하고 공부에 쏟는 노력이 평가절하될 미래의 어느날, 우리의 아이들이 든든히 붙들고 서서 세상을 이겨나갈 버팀목이 바로 그 무엇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준비해 줄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식위에 덧입혀져서 그것을 지성으로 재탄생시키는 요소를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흔히들 마음자세라 말할때의 그 자세입니다. 물론 지식과 지성의 차이를 매꾸어줄 요소로 여러가지 정신적 가치를 들수 있습니다. 가치관, 양심, 판단력, 감성 등등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문화와 환경의 영향을 심하게 받습니다. 동양의 일반적인 음식이 유럽권의 터부가 되고 중동의 오랜 관습이 세계인들의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삶을 바라보고 인지하고 고민하고 노력하고 해결하는 자세는 모든 민족과 문화속에서 공통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머리속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온갖 지식들을 분류하고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결론을 도출하고, 그 결론이 지향하는 미래상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성실하게 걸음을 옮기는 삶의 자세. 이것은 한 인간이 가진 지식체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 인간이 건설하는 인생의 공든탑에 벽돌 한장이 되어 끼여들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세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에 측정 될 수 없고 지식이 아니기에 쌓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삶의 자세는 지식으로 지성이 되게 하고 문화로 문명이 되게 합니다.
공부를 하겠다며 학원에 와서 앉아있는 아이들이 몸을 배배 꼽니다.
쉽지 않은것이 당연하니 나무랄수 없고 의욕없는 것이 당연하니 타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이 시간과 이 노력이 지향하는것이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는 사실은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배우고 연습하고 훈련하는 이유는 ‘삶의 자세’를 배우기 위함이지 ‘삶의 내용’을 배우기 위한것이 아님을 깨우쳐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론 그저 뜨거운 열기 하나밖에 내세울것 없는 뜨끈한 국물이 영양분으로 치면 세계일류급인 햄버거보다 더욱 더 삶을 가치있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추위에 얼었던 속이 화악 풀리고 긴장되었던 근육이 녹진하게 이완되는 기쁨은 영양덩이 햄버거보다 뜨겁고 아름다운 국물이 이루어내는 기적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