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늦은 밤, 하루종일 이어지던 수업을 모두 마치고서 터벅터벅 밤길을 걸어 차에 올라탔습니다. 날이 추워서인지 마음이 추워서인지 움츠러든 어깨를 부스스 떨며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습니다. 이제 차가 예열되기를 기다리며 지난 몇 시간 동안 전화기에 쌓여진 문자며 메일이며 카톡 등등을 하나하나 살펴봐야 하겠지요. 벌써 몇년째인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언제가부터 제 문자와 카톡은 모두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맘 먹고 열어보지 않으면 누가 어떤 연락을 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수업시간엔 책상 서랍속에 들어앉아 있으니 더더욱 그렇겠지요.
노란 아이콘을 터치해서 문자창을 열고 빨란 동그라미가 붙어있는 여남은개 문자들을 하나하나 올리다보니 정말 오랫만에 보는 이름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으응? 이 친구가 뉴질랜드에 왔나? 와아.. 진짜 오랫만이네..’
영국으로 진학을 한 뒤로는 만난적이 없으니 꽤 오랜시간 동안 보질못했군요. 머리속으로 마지막 얼굴을 본게 몇년전인지 헤아리다보니 고장난 계산기처럼 전두엽이 깜빡깜빡 합니다. 이제 제 머리도 수명을 다 해가나 봅니다. ㅎㅎ
뉴마켓으로 학원을 옮기기 전에 졸업을 했으니 최소 5년은 넘었습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절반정도가 지났으니 제가 변한만큼 이 친구도 사뭇 변해 있겠지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메세지를 열었습니다. 역시나 오랫만에 부모님이 계신 뉴질랜드에 방문했다며 한번 만나서 인사하고 싶다는 문자였습니다. 이런 이런~ 어쩌면 이렇게 기특하고 예쁠까~ 얼굴만 예쁜줄 알았더니 맘씨까지 예쁘고 머리만 좋은줄 알았더니 메너까지 좋네요. 역시 JMK의 학생들이란~ ㅎㅎ
하루동안의 피로가 솨아악 가시는듯한 행복감을 느끼며 답신을 보냈습니다. 너무 반갑다~ 연락줘서 고맙다~ 빨리 만나고 싶다~ 맛난 브런치 사줄께~ 그리고 잠시 뒤 우리는 다음날 아침의 브런치를 약속하고 장소를 잡았습니다.
반십년을 넘겨서 만난 L는 조금 어색했습니다. 머리속에 남아있는 똘망똘망한 눈매야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키도 조금 더 커진듯했고 말투도 조금 변했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른티가 났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건강하고 활기찬 어른이기보다는 조금은 피곤하고 지쳐버린 어른의 모습이더군요. 어찌 아니 그럴까요.. 하얀 피부에 볼이 빠알갛던 어린 여학생이 홀홀 단신 영국으로 건너가서 ‘임페리얼’에서 엔지니어링 공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식의 확장을 위해 또 다른 대학원에 지원해서 합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그리움과 서러움에 시달렸을까요. 육체적인 피로와 심리적인 기진함이 얼굴에 묻어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었습니다. 좀 더 이야기를 하다보니 대학원 졸업논문을 쓰느라고 너무 몸을 혹사한 탓에 등과 어깨가 굽어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음식을 시켜놓고도 먹음직스럽게 푹푹 먹지를 못해서 이유를 물어보니 위장이 상해서 그 또한 치료중이라 하더군요. 오랫만에 부모님 품으로 돌아와 거의 매일 잠만 자거나 병원에만 다닌다고 짐짓 울상이었습니다. 에효~ 더 큰 성장을 위해 잠시 정비받는다..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조차도 입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긴시간 동안의 노력과 인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타인인 제가, 나이가 더 많다고.. 조금 더 살았다는 이유로.. 한 인간의 고군분투를 함부로 평가하거나 간섭해서는 안될듯해서 말이지요. 그저 학문에 대한 열정의 측면에선 나이를 떠나 존경스러울 밖에요. 손바닥만큼도 되지 않는 식빵 한 조각을 L이 어렵사리 씹어삼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남은 또 한번의 대학원과정과 계획하고있는 박사과정을 무사히 마쳐야할텐데.. 싶어 염려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우스겟소리로 말한 Ph.D의 의미가 떠올라서였겠지요. Permanant Health Damage (영구적 건강 손실) 이라고... 그러면서 동시에 한참 인생을 즐기고 있을 또래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이유가 궁금해졌습니다. 랑이토토 컬리지에서 IB과정을 마친 후 영국 임페리얼 대학교에 진학해 유체공학을 전공한 뒤 항공 우주 공학 과정으로 대학원을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학습형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공부하기 위해 또 다른 대학원에 진학한다 하니... 도데체 이렇게 공부에 매진하는 이유는 뭘까요? 그래서 진짜로 물어봤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랬더니 뉴질랜드 촌구석에서 20년이 넘게 살아온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듯 털어놓습니다.
학부시절에 항공우주공학을 접하고나서 그 방면에 흥미가 생겨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러고나니 우주선의 궤도와 경로를 설정하는 연구를 하고 싶더랍니다. 요즘은 이 방면에 인공지능을 적극 활용하기 때문에 부족한 전문지식을 보완하기 위해서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대학원에서 배우려고 지원을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번 대학원 코스를 마친후에는 박사과정에서 우주선 경로설정과 제어에 관해 전문적인 연구를 하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잠시 L의 계획을 들으며 가슴이 꽉 차오르는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론머스크가 진두지휘하는 SPACE-X에서 회수가 가능한 보조로켓을 발명해 수직이착륙을 시연하는 모습을 보며 ‘도데체 저런 기술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 개발하는걸까?’ 궁금해하고 부러워했었는데, 그런 똑똑한 사람이 제 맞은편에 떡하니 앉아있었으니 말입니다.
흥분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가며 또 다른 질문을 했습니다. 혹시나 다른 방면으로 진로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느냐구요. 왜냐하면 제가 기억하는 고등학교 시절의 L은 공부뿐 아니라 예술적인 재능도 뛰어났었거든요. 그랬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글쎄요. 그런적은 없었던거 같아요. 저에겐 아무래도 공부가 제일 쉬워서요..’
듣는 순간 마음이 움찔했습니다. 공부가 제일 쉽다니요.. 세상에 누가 들을까 무서운 말입니다. 자칫했다간, 머리 싸매고 공부해도 까마득한 목표점수에 다다르지 못해 좌절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L의 SNS에 몰려들어 테러를 하고도 남을 망발이니까요. 사람나고 공부났지 공부나고 사람 났느냐면서 공부가 제일 쉽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L의 망언을 규탄한다며 시위를 벌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L이 말하는 ‘쉽다’의 진짜 의미를 말입니다. 아무려면 10대 후반, 3년의 시간동안 매주 만나서 머리 싸매고 같이 공부했는데.. 설마 제가 그 속뜻을 모를까요.
세상에 공부가 쉬운사람은 없습니다. 결단코 없습니다. 그 ‘쉽다’라는 의미가 고사성어의 ‘如反掌 (여반장 :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이 쉬움)’ 이나 영어 표현의 ‘A Piece of cake’ 이라면 말입니다. 공부라는 활동 자체가 여지껏 모르고 있던 지식을 습득한다던지 도무지 알수없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인데 이러한 ‘무식’에서 ‘유식’으로의 전환이 절대로 쉬울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다못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뉴질랜드 교육과정조차 완전히 습득하지 못해 허덕이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판국에 L이 공부했던 고차원적인 수준의 학습이 쉬웠을리가요. 어불성설입니다.
그럼 L이 말한 ‘쉬움’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가 경험해 온 그의 삶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장 관심이 가는’ 혹은 ‘틈만 나면 접하고 싶은’ 정도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L은 틈만 나면 책을 읽었고 문제를 풀었고 아이디어를 정리했습니다. 물론 제가 본 모습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여타의 다른 학생들과는 확연히 다른 공부 편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해서 L이 주어지는 모든 과제와 목표들을 척척 해결하는 ‘만능술사’였던것은 아닙니다. 그녀도 슬럼프가 있었고, 실패가 있었고, 받아든 시험점수에 주늑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번도 공부를 향한 관심을 접었던 적은 없었지요. 그렇습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L의 말을 조금 더 길게 늘여서 다시 말해본다면 그것은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공부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가장 쉬웠어요’쯤 될 겁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쉬움’이 노력여하에 관계없이 그 결과로 손에 쥐는 ‘성적’에만 집중하는 결과 지향적 의미라면 L이 말하는 쉬움이란 손에 잡히는 결과에 관계없이 공부에 집중하는 의지 주도적 성향을 뜻하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타고난, 그리고 훈련된 편향성이 지금의 L을 만들었고 미래의 L을 만들게 되겠지요.
어느 젊은 청년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은 정말 돈벌기가 좋은 시대라구요. 이 시절에 머리를 잘 써서 돈을 긁어 모아야지 그냥 허투로 시간을 지내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거라구요. 그러면서 온라인 마케팅이며 온라인 강의 플랫폼이며 여러가지를 소개해 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광고는 이렇게 만들어야 고객들이 혹하고 SNS는 저렇게 관리해야 트래픽이 몰리고 강의 비디오는 이렇게 찍어서 운영해야 돈이 되고.. 한참을 듣고 배우다보니 문득 ‘현타 (갑작스런 현실인식을 뜻하는 MZ세대 용어)’가 오더군요. 그 많은 수단과 노력의 목적은 결국 더 많은 재정적 수입이었을뿐, 더 좋은 교육이나 더 향상된 진학 결과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습니다. 실제적인 변화나 발전의 보상으로 더 많은 수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 사람들을 홀려 주머니만 채우는 방법들을 설파했던거지요. 이런 마케팅, 투자, 사업아이템들이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꽤 인기입니다. 방법이야 어찌되었던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사고가 팽배하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결과지향적인 성향은 학습과정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공부는 안하더라도 성적은 좋아야 하고 노력은 안하더라도 진학은 잘해야 합니다. 학습전략은 성적표의 숫자를 상향조정하는데에만 집중되어 있고 시간관리의 최우선 과제는 ‘놀거 다 놀면서 점수 올리기’라는 꿈같은 허상입니다.
결과 지향적으로 변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걱정이 많아진 탓일까요. L과 헤어지고 돌아온 뒤 그녀의 ‘쉬움’에 대해 곱씹어 생각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공부가 가장 쉬웠다는 그 말에 함축된 학문을 향한 열정과 애착이 그 어느때보다 진지하게 다가왔습니다.
현실적으로 공부의 목적이 고득점의 취득인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구나 공부한 내용보다, 투자한 시간보다, 땀 흘린 노력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고 싶어합니다. 어쩌다 나의 노력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표를 받아들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듯 한숨부터 터져나오는 것은 어쩔수가 없는 무조건반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망하고 소원하는 고득점을 향한 과정은 기본적으로 ‘상황과 조건에 관계없이 공부에 관심을 쏟고 시간을 할애하는’ 자세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 기본적인 공부로의 편향성이 노력을 즐길만하게 만들고 인내를 견딜만하게 합니다. 그리고 모든 시험관들과 평가자들과 입시사정관들과 교수님들은 이런 ‘쉬움’을 마음에 품고 실천하는 학생들을 찾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기위해 문제가 만들어지고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이제 연말 시험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치실분들도 계시겠지만 시험준비에 필요한 시간과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한번 계산해 보신다면 8월말, 이 시점이 되돌릴수 없는 포기국면의 직전인 것을 알게 되실겁니다. 이제 아이들은 마음이 급합니다. 그래서 그 급한 마음에 또 다시 결과중심의 공부에 매진할 겁니다. 무조건 외워부칠거고 무조건 문제와 답을 연결해가며 며칠뒤면 다 휘발되고 말 ‘공허한 空부’를 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나서 새학년이 되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책상앞에 달라붙겠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또 다시 같은 길을 걷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공부입니다. 몇점을 받기위해 몇시간 공부를 해야한다는 앞뒤가 뒤바꾼 역설이 아니라 몇시간 공부를 했더니 몇점이 나왔다는 정설을 따르는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공부가 가장 ‘쉬운’ 몇개월을 살아낸 후 올해의 목표에, 그리고 삶의 목표에 한걸음 더 가까워진 연말을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