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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무력감에 대한 세계적인 통계는 제한적이지만, 관련된 정신건강 지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기준으로 전 세계 성인 중 자살 시도의 연간 유병률은 1,000명당 약 4명으로 추산되었습니다. 이는 무력감과 같은 정신적 어려움이 심화될 경우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무기력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주변에서는 흔히 “게으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것이다”, “택배 상하차가 최고의 치료제다”와 같은 말들이 오해에서 비롯되곤 합니다. 무기력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무기력과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왜 우리는 때때로 삶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빠지는 걸까요?
이러한 현상은 우리 내면의 ‘페르소나’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페르소나는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타인에게 보이는 외적인 모습이나 역할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가 성장하면서 가정과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맞추려 하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학생으로서 열심히 공부하고, 20대 후반에는 직장을 갖고, 30대에는 결혼하여 아이를 양육하는 등 한국 사회에서는 페르소나가 비교적 획일적이고 높은 기준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거나 뒤처졌다고 여겨집니다.
요즘 들어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청년들, 대기업에 입사한 후 몇 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은둔하는 사례가 종종 보도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해 무언가를 성취한 후에도 무기력에 빠지는 걸까요?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무기력한 이유는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우리는 “게으름 피우지 말고, 남들 보기에 좋은 모습을 유지하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습니다. 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페르소나에 맞추려는 강박을 형성하며,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여 번아웃과 무기력을 경험하거나, 페르소나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 빠지는 것입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르소나에 얽매여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다가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핵심은 스스로를 위한 ‘빈틈’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침대에 누워서도 내일 할 일을 걱정하거나, 계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약간의 여유를 만들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빈틈이 있을 때 무기력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이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존세’를 지불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들어, 아이를 양육하면서 영주권을 따기 위해 영어 준비를 하는 유학생 엄마가 있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의 도시락을 챙겨 학교를 보내고, 아이가 학교에 가 있는 사이 영어학원을 다니며 공부를 합니다. 아이가 하교 후, 방과 후 학교를 보내기 위해 픽업을 하고, 저녁을 준비하고 과제를 봐 줍니다. 아이가 잠이 들면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해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듭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이와 시간을 보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같이 나가 활동을 하고 일주일 장보기를 합니다.
이 분이 자신에게 빈틈을 주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제 3자인 사람에게도 별로 틈이 보이지 않는데 본인에게는 그 빈틈을 주기 위한 시간은 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분이 만약에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반찬을 직접 만드는 대신 조리된 반찬을 사기를 결정하고, 자신의 시간 마련했다면 이 분은 실존세를 지불한 것입니다. 이 분은 이 빈틈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요리한 음식을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세금처럼 치른 것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우리 삶의 빈틈도 공짜로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무언가를 포기 해야만 우리 삶에도 빈틈이 생깁니다.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세웁니다. “열심히 살아라, 시간이 없다”고 강요하죠. 물론 열심히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무기력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또는 무기력에 빠지고 싶지 않다면, 세상이 요구하는 방향과 반대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이미 빈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건강하게, 더욱 오래 열심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쓸모없어 보이는 시간, 무용해 보이는 시간이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 순간이 우리를 무기력에서 구해줍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빈틈이 주는 위로, 그 시간을 위해 오늘 자신에게 작은 빈틈의 시간을 선물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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