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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여태까지 거의 하지 않았던 일을 하나 하게 됐다. 한국 대중문화 수업을 하게 되면서 특히 노르웨이에서 한국 대중문화를 좋아하는 젊은이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구미권 나라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흔히 ‘코리아부’(Koreaboo)라고 부른다.
‘코리아부’들의 한국과의 만남은 보통 케이팝이나 한국산 게임 등으로 시작하지만, 꼭 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적어도 일부 ‘코리아부’는 나아가서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어까지 배우기 시작한다. 한국학이 비교적 약한 북유럽권 같은 경우에는 ‘코리아부’야말로 한국학 관련 교원들이 가장 중시하는 ‘잠재적 학생’들이다. 나처럼 한국의 한류를 포함한 그 어느 대중문화에도 별다른 개인적 취미가 없는 한국학 학도들도 그래서 ‘코리아부’ 연구에 최근 상당한 열을 올린다.
솔직히 고백하자. 그들을 만나기 전에 나는 그들에 대한 편견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냥 케이팝의 현란한 리듬과 일사불란한 칼군무에 현혹되고 컴퓨터 게임으로 인생을 낭비하는 중산층 무뇌아들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코리아부’의 세계를 파헤치다 보니 나는 매우 의미심장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다는 아니라도 상당수의 ‘코리아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비판적인 한국 애호가들이었다. 그들이 자국의 문화보다 어쩌면 한국 문화를 더 선호하는 만큼 한국 대중문화 생산에 대한 요구 수준도 생각보다 높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들의 관점은 내 관점과 그렇게까지 다르지도 않았다.
나의 한반도와의 인연은 대학 입시에 성공한 1989년에 처음으로 접한 1958년도판 김일성종합대학의 조선어 교과서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가서 1990년대 초반의 한국 대중문화, 즉 정태춘이나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들도 접하게 됐지만, 내가 처음 들은 한반도 계통의 가요는 북한의 ‘적기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을 것이다. 북한의 대중문화라고 할 만한 노래나 영화 등과의 인연이 먼저 이루어진 만큼 북한 현실의 비극적 측면들을 일찍부터 마음 아프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한때 동유럽 전체를 휩쓸며 엄청난 인기를 거둔 북한 액션 영화 <명령 027호>(1986년)를 30년 전에 처음 봤을 때, 그 영화에서 실감나게 접한 극도로 군사화된 사회의 모습은 나로서는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와의 인연을 한국의 대중문화부터 시작하는 북유럽의 ‘코리아부’들은 바로 이 대중문화 속에서 훤히 보이는 문제들을 놓고 종종 고심하게 된다.
‘코리아부’들의 관심은 대개 케이팝에 집중된다. 그런데 그들의 케이팝 이해는 생각보다 깊고 나름대로 체계적이다. 그들은 케이팝을 가능하게 만든 한국형 랩이 서태지의 노래에서 선구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많은 경우에는 1995년의 ‘컴백홈’ 가사 정도는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한국어로― 낭독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자주 물어보곤 한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사회에 대한 반항심이 절실히 느껴지는 그런 가사들이 왜 최근과 같은, 그다지 사회적 의제와 무관한 가사로 바뀌게 됐느냐고. 나는 ㈜에스엠엔터테인먼트 같은 업체들, 즉 연예계 자본이 계획 생산하듯 배출하는 그룹들의 가사가 자본에 비판적이기를 과연 어디까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그들에게 반문하곤 한다.
그런데 한국 팝 음악 가사들이 점차적으로 사회적 의제를 상실해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도 나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는 ‘코리아부’들은 다수가 젊은 여성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케이팝에 재현되는 여성 표상의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다. 그들은 이효리와 같은 일부 한국 여성 연예인에게 여성으로서의 바람직한 주체성과 행위자성을 발견하지만, 최근의 ‘걸그룹’에 대해서는 보면 볼수록 아쉬움만 깊어진다. 미성년자인 아이돌 그룹 멤버들에게 노출이 매우 심한 무대 의상이 강압적으로 강요되는 것도 그들에게는 연예계 자본의 가부장적 폭력으로 비치지만, 무엇보다 ‘귀엽고 섹시한 여동생’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양성평등, 여권 신장이 화두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인식된다.
힘세 보이고 역동적인 남자 아이돌 옆에서 여성이 신체 노출과 남성의 보호를 요청하는 듯한 ‘귀여운’ 모습으로 매력 포인트를 얻어야 하는 것은, 남성과 자신들이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에게 그저 부자연스럽게 보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다 해도 연예계 자본이 걸그룹들을 생산하고 마케팅하는 방식은 과연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보일까?
북유럽의 ‘코리아부’들을 포함하여 한류의 국내외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은 하나 더 있다. 심하면 13년이나 되고, 게다가 착취적이라 할 수 있는 수익 배분율과 인권 침해로 여길 만한 사생활 관련 조항들을 포함하는 속칭 ‘노예 계약서’의 문제다.
사실 내가 만난 상당수의 ‘코리아부’는 10년 전 동방신기 멤버들의 일부가 소속사인 에스엠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벌인 법정 공방의 이모저모를 나보다 훨씬 더 자세히 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의아해하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 중 하나는 “연애금지와 같은 개인 사생활의 권리, 즉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조항들을 포함하는 이런 계약서들이 한국의 법체계상 유효하냐”는 물음이다.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어느 나라에서도 연애금지 조항은 당연히 법적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하고 원천 무효일 것이다. 과연 연예인들의 사생활까지 팬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여 연예계 자본의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오늘날 케이팝과 같은 ‘비즈니스’의 방식은 앞으로 세계인들의 이해와 공감을 어디까지 얻을 수 있을까?
스타들도 연예계 자본으로부터 착취를 당하지만 어쨌든 스타인 만큼 그나마 후한 노력의 대가를 받기는 한다. 그런데 한류 문화 상품 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도 박봉과 각종 부당 노동행위에 계속 시달리는 ‘한류 문화의 무산계급’도 있다. 바로 영화나 드라마 촬영에 없어선 안 될 보조출연자, 즉 ‘엑스트라’들이다.
노르웨이 소비자들이 흔히 쓰는 한국제 자동차나 휴대폰이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저임금 불안 노동에 의해 생산되듯이 노르웨이 ‘코리아부’들이 사랑하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는 보통 간접 고용된 비정규직인 ‘엑스트라’들의 저임금 노동으로 만들어진다. 최저 시급에 불과한 저임금만의 문제일까?
드라마 촬영의 경우에는 임금은 훨씬 나중에 지급되고, 또 어렵게 땀 흘려 번 돈을 받지 못하는 일들도 종종 있다. 영화판의 경우에는 특히 위험천만한 전투신 등으로 부상당한 보조출연자는 보상금과 치료 지원을 쉽게 받지 못한다. 늘 간접 고용을 수반하여, 오늘 사용자에게 대들었다가는 내일 부름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또한 항상 보조출연자들의 삶을 떠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영화 내지 드라마 상품을 양심있는 대중문화 소비자는 과연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까?
상업적 대중문화를 우리 시대의 ‘인민의 아편’으로 보려는 시각도 있지만 그 순기능도 인정할 만하다. 한국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여 북유럽 사람들이 한국과 친숙해지면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한국과 친숙해지면 친숙해질수록 저임금과 불안 노동, 여성 이미지의 성애화와 연예계의 ‘을’들에 대한 인권 유린에 기반한 한류 생산 메커니즘부터 심하게 의심하게 된다.
그들은 한국을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노예 계약’이나 ‘연애금지’, 아니면 하루에 15~20시간이나 일해야 하는 드라마 스태프들의 지옥 같은 삶을 문제로 삼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무한한 일방적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한류붐은 적어도 북유럽에서는 오래가기 힘들 것이다. 세계인이 즐길 만한 한류라면 평등과 연예계 노동자 인권 존중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출처 : 한겨레신문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