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 | 지난칼럼 |
올 한 해는 여행의 한 해가 될 거 같다. 2월 중순부터 시작한 여행이 아직도 진행 중이며, 10월 말까지 스케줄이 꽉 차 있는 상태이다. 지금 잠시 집에 돌아왔으나, 또 다시 집을 떠나야할 것 같다.
그동안 예약해두었던 항공 티켓의 예약 변경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짜 변경부터 시작해서 국내선 티켓도 몇 번의 변경을 거치면서 지내왔다. 계획에도 없었던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장거리 기차 여행도 하게 되었고, 장거리 기차여행의 즐거움도 실컷 느껴보았다. 총 8시간 반 동안 기차 안에서 있었는데,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다. 늙으면 아이가 되어버린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내가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역무원, 카페 웨이터들이 외국영화의 캐릭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생각이 너무 낭만적이었나?
오후 4시 15분에 파미에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하늘도 벌써 어둑어둑해져가고 있었고, 겨울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한국에서 온 친구와 나만 달랑 남겨 놓고 떠난 열차. 맨 처음 파미에 온 날이 생각이 났다.
2001년 2월 20일에 두 딸들을 데리고, 밤기차를 타고 오클랜드를 떠났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기차여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21일 캄캄한 새벽, 오직 희미한 가로등 하나만 켜있는 역에 도착했을 때, 그때 역시 달랑 우리 세 모녀만 기차역에 내려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에 나타난 친구가 어찌나 반가웠던지. 한 여름이었지만, 쌀쌀한 새벽 공기가 몸을 오그라들게 했다. 미지의 세계에 와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각오와 희망이 있었기에 6살짜리 막내까지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스산함을 견뎌냈다.
한 달 전에 큰 딸을 데리고 파미에 와서 사전답사를 하고, 큰딸은 키위 집에 하숙을 시켜놓은 상태였다. 우리가 파미에 도착한 날이 큰딸의 생일날이었고, 생일상도 못 차려 준채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아침을 먹었다.
그 이후로 우리 네 모녀는 서로 협력해서 이삿짐 푸는 것부터 모든 것들을 함께 해나갔다.
이제껏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일들이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른 건, 어쩌면 겨울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익숙한 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큰애가 내려서 내 친구한테 인사를 하고 짐을 차에 실었다. 22년이란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지나가버린 것이다. 세월 정말 빠르다.
이번 기차 여행은 돈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요즘 기차 요금은 항공료와 별 반 차이가 없다. 기차 여행의 묘미를 마음껏 즐기고 싶어서였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도 나처럼 지루하지 않았으며, 색다른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친구는 8월 3일까지 파미에서 나와 함께 지낼 예정이다. 중간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잘 모르겠으나, 아직은 그냥 편안히 쉬면서 사색하면서 지내다 가고 싶어 한다.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
라군에 가서 오리에게 밥 주는 것을 시작으로 파미 투어는 시작이 되었다. 작은 도시지만, 아기자기 아름다운 것들이 숨어 있기에, 차근차근 보여줄 계획이다.
엊그제는 에스페레네드 공원을 시작으로 뱀장어 서식지까지 걷게 되었다. 내 친구가 물가로 가니까 뱀장어들이 몰려들었다. 아마 먹이를 주는 줄 알았었나 보다. 뱀장어 보호 구역이라서 개를 데리고 가도 안 되고 낚시를 해도 안 되는 곳이었다.
통통하게 살이 붙은 뱀장어들이 참 귀여웠다. 팬테일 까지 우리 곁을 알짱거렸고, 그날은 운이 참 좋은 날이었다. 파란 하늘에 바람 한 점 없었고, 억새들과 소나무들이 오가는 길을 즐겁게 해주었다. 파미가 손님 접대를 아주 극진하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11시부터 시작해서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다녔으니, 많이도 걸었다. 13000보 정도 걸었다. 제법 많이 걸은 것이다. 그래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덕분에 저녁이 꿀맛이었다.
친구는 요리 솜씨가 아주 좋다. 요리를 쉽게 빠르게 잘한다. 일머리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만하다. 일머리만 있는 게 아니라 정성스럽게 한다. 부엌일에서 거의 손을 뗀 나와 달리 그녀는 부엌일을 즐긴다.
독감에 걸린 막내를 위해 대추 생강차를 끓이는 그녀를 보면서 감탄을 했다. 손동작이 다르다. 섬세하면서도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내 머리를 잘라줄 때처럼 숙련된 손동작으로 쓱쓱 해나갔다.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얼마나 부지런하게 살림을 잘해왔는지, 그녀의 손놀림이 말해주고 있었다. 타고난 건강도 한몫했겠지만, 평소 성실한 습관이 몸에 밴 까닭일 것이다. 좋은 습관이 건강도 잘 지키지 않겠는가.
그녀가 만든 대추 생강차는 막내가 독감을 빠르게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도 도움이 된다. 앞으로 겨울 내내 대추와 생강을 함께 달여서 먹어야겠다. 벌써 내 몸은 예전보다 덜 추우며 기운도 훨씬 더 좋아져 있다.
8월에 둘째딸 산바라지를 하러 오클랜드로 가야 하는데, 첫 손녀를 봤을 때보다는 좀 더 딸과 사위에게 도움이 될 것만 같다. 예전보다 훨씬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녀와 나는 장도 함께 보러 갔다. 생활력이 강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라서 매와 같은 눈을 가졌다. 살림에 손을 놓고 장도 내가 직접 보지 않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격비교도 칼 같이 잘하고, 물건의 질도 금방 가려낸다.
우리는 채소가게에 가서 배추를 샀다. 배추가 제법 잘생기고 알이 꽉 차 있었다. 두 포기를 사서 김치를 담기로 했다. 그녀의 솜씨라면 아주 맛깔스러운 김치가 나올 것이다. 내 예상 그대로 그녀가 담근 김치는 상상을 초월한 맛이었다. 혼자 사는 홀아비가 그녀의 김치 맛을 보고 나면 무조건 구애를 할 것만 같다.
수제비도 금방 뚝딱뚝딱 조물조물 잘도 빚어서 끓이고, 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바람에 외출이 여의치 않았지만, 그녀의 음식 솜씨 덕분에 즐겁고 행복했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 뉴질랜드로 여행 오라고 했는데, 오히려 내가 그녀 덕분에 행복을 누리고 있다.
다음 주 수요일에 김장하기에 딱 좋은 크고 맛있는 배추가 나온다고 했다. 친구 덕분에 올해 김장은 완전 땡 잡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김장을 친구와 함께 담그게 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가 참 복이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친구 덕분에 음식 복까지 생길 줄이야!복이 복을 낳는구나!
8월 3일에 한국을 떠나는 친구. 뉴질랜드에 있는 동안 즐거운 일상을 누리다가 가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 가족에게 복을 많이 쌓고 있으니, 쌓이는 복만큼 행운도 늘어날 것이다.
아자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