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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국가란 애당초부터 상당한 “세계성”을 의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적 냉전의 양 진영에 의해서 한반도가 분단되어 두 개의 국가가 생긴 이상, 양쪽 국가에서는 그 소속 진영의 ‘보편적 의제’에 대한 관심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예컨대 북한에서도 베트남 “민족 해방 투쟁”과의 연대에 대한 켐페인이 벌어지고 궐기 대회들이 조직되고 성금이 모아지는가 하면, 남한에서도 “월남 망국”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온 일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남민전을 만든 남한의 일각의 급진 세력들은 그 모델로 명시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을 이용한 것이죠. 남도 북도 “냉전 국가”이었던 만큼 국제적 냉전은 그 사회와 문화에 침투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도 그런 침투에는 분명한 한계가 주어져 있었죠. 예컨대 한국군의 “파월”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어디까지 미국의 “제3군 군의 이용 작전”의 일부분이었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서울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켜도 헝가리 등 동유럽 정치에는 한국의 시민 사회가 직접적으로 관여할 여력도 의사도 없었어요. 남북이 국제 냉전의 주된 주체가 아니었던데다가 남한의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나설 만큼의 국력, 정보력, 경제력, 시민 사회 발달 정도 등의 한계성이 컸던 것이죠.
1990년대 초반에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국력이 성장돼도, “외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한국(인)의 적극적인 대응이나 역할은 그렇게까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한 국내에서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지만, 이라크를 비롯한 10여 건의 파병들은 역시 주체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미국의 강요나 유엔 등 국제 사회의 요청/권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분쟁 지역에 대한 한국의 인도적 지원 등은 종종 이루어졌지만, 그 규모 역시 경제력에 비해 퍽 작았습니다. 외국과 한국의 주된 연결줄은, 여전히 일차적으로 “경제”, 즉 무역과 투자이었습니다.
예컨대 작년 미얀마 쿠데타와 그 뒤의 민주주의 탄압, 군의 잔혹 행위 등에 대해서 한국인들의 열띤 반대, 미얀마 민중들과의 연대 운동 등이 비교적 크게 일어나도 포스코인터네셔널 등 한국 기업들의 미얀마 투자 계획 등은 그냥 그대로 “척척” 계속 진척돼 왔습니다. 즉, 외국에서의 인권 탄압 등에 맞서는 외부자들과의 연대하여 그들의 편에 관여하려 하는 시민 사회보다는, “외국”을 “벌이 기회”로 인식하는 기업의 힘은 한국 사회에서 훨씬 더 막강한 것입니다.
최근 10여년만 해도 미얀마에서의 로힝야 탄압과 쿠데타, 시리아와 예멘에서의 내전 등으로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됐지만, 한국에서 거주하는 난민의 인구는 천 여명에 불과합니다. 즉, 대한민국은 “외국”과의 경제적 교류로 “이윤”을 취할 수 있어도 “외국”의 인도적 문제 해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여태까지 그다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소 방관자적이고 “경제” 위주의 자기 포지셔닝에는 이제 한계가 드러난 것 같기도 합니다. 세계 문제에의 관여를 계속 등지기에는 대한민국이 너무나 가시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선진국으로 공인되기도 했지만, 자동차나 휴대폰 이상으로 한국산 대중 문화가 전세계 방방곡곡에 퍼져 세계인들이 소비하는 글러벌 대중 문화의 “새로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대중 문화는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 같이 비판성이 강한 작품들을 수출한 나라라면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보장돼 있다는 것을 누구나 눈치 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력이 있는데다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라면 세계인들의 기대 역시 이젠 다릅니다. 이런 나라라면, 예컨대 푸틴의 안보-경찰 독재와 그 독재의 강제 징집 등이 싫어서 외국으로 도주한 러시아 사람들이 충분히 가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할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기도 합니다.
한국의 과거 유신 독재를 어떤 면에서 상당히 닮은 푸틴 정권에 맞서거나 그 정권의 마수를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1987> 같은 영화에서 형상화된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를 끌어내린 나라인 한국에서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올 것이라고 충분히 기대하는 게 가능하단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의 기대를 냉정히 차버리고 그 사람들을 체포나 강제 징집이 가디리고 있는 곳으로 다시 보내버리는 것이 과연 한국 민주화 운동의 전통에 대한 “배신”이 되지 않을까, 라는 물음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가”가 못하는 게 많습니다. 예컨대 지정학적인 “지층”들 사이에 낀 나라인 만큼, 국가가 외교 차원에서는 중국이나 러시아 등과 지나치게 각을 세우는 것을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이해하고도 남지만, 적어도 바깥에서 지속적으로 발생되는 각종 인권 탄압 등의 피해자들에 대해서 한국은 이제부터 난민으로서의 수용을 포함한 좀 더 적극적인 인도적 관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 기업들이 계속해서 특히 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나가서 범하는 각종의 부당 노동 행위의 근절을 위한 노력을, 국가와 시민사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게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부당 노동 행위나, 국내에서 판치고 있는 동남아시아 출신이나 흑인 등에 대한 노골적이고 악질적인 인종주의 등은, 한국의 수출용 대중 문화가 구축하고 있는 “민주 국가 한국”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인권 등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실천이 뒷받침하지 않는 “연성 권력” (soft power)만의 무한 확산은, 언젠가 어느 순간 급격한 위상 추락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기에, 이제부터의 외부를 향한 노력, 그리고 한국 사회내 외부자 출신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노력이 중요할 것입니다.
■ 박 노자
오슬로대학교수, 한국학자, 칼럼니스트
소련의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데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자랐고,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한국인이 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했고, 모스크바 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 으로 주목받았으며,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러시아 혁명사 강의』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